앨범 이미지
Ruby
제니(JENNIE)
2025

by 정기엽

2025.03.12

블랙핑크의 연이은 2차 개인전이 갖는 공동 의의는 레이블의 관여가 아니라 주체성을 갖고 만들어가는 작품들이라는 데 있다. ‘Solo’로 그룹 전체 개인 활동의 포문을 열었던 제니가 넷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한 < Ruby >에는 나에서 우리, 1인칭 시점이 가득 들었다. 2023년 ‘You & me’까지 테디가 만들어준 멜로디 위에 뛰놀던 그는 독립 후 대다수의 곡에 참여하며 스토리라인을 직접 집필했다. 자신의 가격표에서 YG 브랜드 로고를 뗀 제니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존재로 군림한다.


Jennie Ruby Jane, 성명을 적어 보는 데서 이번 앨범은 내면 탐구를 파헤친다. 미들 네임과 라스트 네임을 각각 제목과 서두에 명시하고, 타이틀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 오래 옭아매던 가십에 분노를 표하고 폭주하는 ‘Like Jennie’는 그의 주특기인 랩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무대다. 디플로가 비트로 만든 파이트 링에서 명쾌하게 승기(勝氣)를 든다. ‘With the IE (way up)’는 제니퍼 로페즈 ‘Jenny from the block’에 쓰여 잘 알려진 이넉 라이트(Enoch Light)의 1975년 곡 'Hijack'을 샘플링해 선대 뮤지션이 남긴 리듬을 센스 있게 재해석하며 올드스쿨 힙합으로 자아를 감싼다. “Ya-ya-ya”를 외치는 목소리에 쾌감이 깃들며 속 시원한 한풀이를 잇는다.


이러한 제니 탐독의 종착점이자 하이라이트는 단연 ‘Zen’이다.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불교와 선(禪)을 모티브 삼아 절대우위적인 미학을 선사한다. 트랙 리스트 중앙부에 자리하며 ‘Like Jennie’로 표출한 정념을 번뇌로 씻어낸 듯 본질적 가치를 드높인다. 뮤직비디오 속 한국사 최초 여왕인 선덕여왕을 흡수해 제작한 의상 등 다각도 관점에서 녹여낸 여성 연대와 종교 철학은 자연스레 이전 싱글 ‘Mantra’부터 이어져 온 메시지성을 극대화했다. 셰익스피어 5대 희극 < 뜻대로 하세요 >에서 영감받았다는 본작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 각자의 자유의지를 일깨운다. 음악으로 너무 무겁지 않게 의식을 불어넣는 제니의 영리함이 활동을 연 두 싱글에서 드러난다.


연달아 각인한 J가 달처럼 공전해 L이 되어 자립심을 키우는 ‘ExtraL’ 역시 일관된 주제를 품는다. 최근 그래미 베스트 랩 앨범을 수상한 도치와 140BPM까지 오르는 빠른 비트에서 힙합 특유의 당당한 멋을 풍긴 것. 이전에 블랙핑크와 합을 맞춘 두아 리파와 함께한 빼어난 드라이브 뮤직 ‘Handlebars’와 더불어 해외의 여러 이름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그의 능력치를 증명한다. 존재감의 축소를 불허하고 마치 한 팀처럼 조화로이 섞인다.


차일디시 감비노, 칼리 우치스와의 ‘Damn right’으로 개연한 3막은 루비색 커튼 뒤를 노래하듯 한결 차분한 양상을 띤다. 비욘세 ‘Formation’, 켄드릭 라마 ‘Humble.’ 등 히트곡을 프로듀싱한 마이크 윌 메이드 잇이 다수 참여한 서정적인 후반부는 내밀한 독백을 효율적으로 조명한다. 강인한 외침이 멎은 밤 나약한 모습을 공유하는 ‘Starlight’과 깨진 우정을 향한 진심 어린 편지 ‘Twin’이 이 구간의 명장면이다. 여느 음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잔잔한 마무리지만, 클리셰란 그만큼 공통된 감정을 이끌기에 더 큰 이입을 낳는다.


“세상의 많은 남자들도 실제로는 겁쟁이들이지만 용감한 척 허세를 부려서 세상을 지배한다고.”


셰익스피어의 앞서 언급한 희곡 속 대사다. 제니는 가진 영향력을 이 같은 청중의 용기로 환원했다. 제2, 제3의 제니를 꿈꿀 불특정 다수에게 미약한 허세에서 창대한 장악력이 될 힘을 불어넣으며 “너라고 못 할 게 뭐냐”는 수신호를 보낸다. 최고의 화제성을 갖춘 그가 팔로워들이 만들어줄 확보된 성적에 안주하지 않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해 더 큰 성취감을 맛봤다. 각 곡의 뚜렷한 소구력이 묶어놓고 보더라도 빛을 잃지 않는다. 상업성에만 얽매인다는 K팝의 오명을 씻고 능동적인 스타가 탄생시킨 반짝이는 예술적 산물이다.


-수록곡-

1. Intro: Jane (With. FKJ)

2. Like Jennie [추천]

3. Start a war

4. Handlebars (With. Dua Lipa) [추천]

5. With the IE (way up) [추천]

6. ExtraL (With. Doechii) [추천]

7. Mantra [추천]

8. Love hangover (With. Dominic Fike)

9. Zen [추천]

10. Damn right (With. Childish Gambino & Kali Uchis)

11. F.T.S.

12. Filter

13. Seoul city

14. Starlight [추천]

15. Twin [추천]

정기엽(gy24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