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쌍은 대박은 못 이뤘을지라도 중박은 이어가는 그룹이다. 엑스틴(X-Teen)과 허니 패밀리(Honey Family)를 거쳐 2002년 개리와 길 둘만의 여로를 걷기 시작한 이후 이들은 항상 많은 사람으로부터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대부분 가수처럼 새 앨범의 발매 날짜에 맞춰 버라이어티 쇼프로그램에 나와서는 '나 좀 도와주라'는 식의 곤궁하고 절박한 코멘트를 남발하지 않는데도 음반 판매량은 꾸준하며 라디오에서의 리퀘스트 순위도 꽤 높다. 빅히트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남부럽지 않을 만큼 그들 노래는 늘 사랑을 받았다.
디제이 디오시(DJ DOC)처럼 한순간에 군중을 방방 뛰게 할 만한 뽕 바운스가 있었던가? 아니다. 그렇다고 엠시 몽과 그의 노래처럼 밝고 경쾌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적극적인 인사를 건넸던 것도 아니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 둘이 늘 선글라스를 끼고 곧 먹구름을 모셔올 듯 우중충한 음악만 했다. '우중충하다'는 표현이 다소 공격적일 수도 있지만 가장 단순하게 리쌍의 스타일을 설명하자면 저 단어가 친절하다.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하는데도 슬픔이 한 타래는 있어 보였고 희망을 담은 태양을 달고 더 위로 가자고 흥얼거려도 물 먹는 하마 하나는 놔둬야 할 만큼 그들의 곡은 습기가 가득해 보였다. 결국, 최근에는 내가 웃는 게 아니라며 부정(否定)으로 절절한 마음을 털어놓는 상황까지 도래했으니 울적함은 리쌍 노래의 안감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팬과 대중은 그걸 원했다. 그 침울함으로 점철된 가사는 스타일을 넘어 이제 리쌍만의 어법이 되었고 객원 보컬들인 지 플라(G-Fla)의 정인, BMK, 알리(Ali)가 부른 멜로디 파트와 길의 훅(hook)은 고막으로 곧장 달려드는 강한 엔진을 단 것이었다. 게다가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고 오늘의 내 생활, 내일을 걱정하는 노랫말은 성인 누구라면 다들 여러 번 경험해 본 것이고 공감도 100%를 훌쩍 넘는 내용이기에 빠르고 쉽게 다가설 수 있었다.
가슴 휑한 사연이 담긴 그들의 음악을 꼭 이모 랩(emo rap)으로 한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형식에서는 분명히 다른 래퍼들보다 독보적이다. 이번 역시 특유의 정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타이틀곡 'Ballerino'는 지난날을 회상하는 랩이 친근하게 들어온다. 악센트가 확실히 솟아나는 개리의 래핑은 감정이 잘 녹아들어 있으며 윈디 시티(Windy City) 멤버 정상권의 퍼커션 연주와 기타가 합쳐져 어쿠스틱한 멋을 자아내는 중에 신시사이저 멜로디와 스트링이 사랑의 한때를 기억하며 슬퍼하는 이의 외로운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스케치한다.
노래 제목만으로 가사를 만든 에픽 하이(Epik High)의 '선곡표'처럼 영화명으로 노랫말을 구성한 '영화처럼'은 일견 이채롭게 느껴지지만 곡 전체가 아닌 첫 번째 버스(verse)만 그러한 양식일 뿐이라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씁쓸한, 가족 모두를 갯과의 포유동물로 만들어버리는 욕설 스킷과 연결되는 '부자 (Project)'는 리쌍 특유의 신세 한탄이 정점에 이른다. 아무리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긍정적인 자세와 다짐이 노래에 묻어난다 해도 어딘지 모르게 염세적으로 보인다. 이별이 잘된 일이라며 싱글 인생이 편하다고 말하는 'Dead phone'에서도 이들만의 역설은 여전하다.
한편의 쇼를 시작하는 것처럼 활기찬 비트를 뿜는 'Vegabond LeeSSang'을 제외하면 '검은빛 해'라고 명명한 타이틀이 딱 소리 나게 어울릴 정도로 앨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다소 무겁다. 때론 장난기를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삶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그늘지고 축축하게 살아가는 이의 한숨까지도 섬세하게 묘사하려는 듯한 개리의 감수성 짙은 노랫말은 한 차례 더 계속된다. 밝음과 정열, 희망을 대표하는 태양이지만 리쌍의 그것은 아직 어둡다. 그리고 그 어두움을 다수가 이해하기에 이들의 미들급 흥행은 여전히 유효하다.
-수록곡-
1. 007 (작사 : 개리 / 작곡 : 길)
2. Ballerino feat. Ali (개리 / 길)
3. 영화처럼 feat. Ali (개리 / 길)
4. 강변살자 Skit
5. 부자 (Project) (개리 / 길)
6. Sunshine (개리 / 길, Primary)
7. 살아야 한다면 feat. Ali (개리 / 도끼)
8. Vegabond LeeSSang feat. 이하늘 (개리 / 길)
9. Dead phone (Intro)
10. Dead phone feat. Rado, Ali (개리 / Rado)
11. 투혼 feat. Double K, Dynamic Duo, Sean2Slow (Sean2Slow, 개리, 개코, 최자, Double K / 도끼)
12. 누구를 위한 삶인가 (사생결단 OST) feat. 류승범, 황정민 (개리 / 길)
13. 내가 웃는게 아니야 (Remix) feat. Ali (개리 /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