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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정재형
2002

by 이민희

2002.11.01

잘 만들어진 것과 감동을 주는 것은 다르다. 만약 기발한 작곡과 편곡이 살아 있는 어느 곡에 많은 악기가 동원되고, 또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 산고의 녹음을 거쳤다 하자. 그렇지만 이런 장인정신(?)이 투영되었다 해서 음악이 꼭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단순히 표현에 들인 공과 음악적 우수성만으로 감동의 함량을 재단하기에 음악을 느끼는 우리의 가슴은 그리 관대하거나 논리적이지 못하다.

<중독>의 음악에는 수석 영화음악 학도 정재형의 섬세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각 곡마다 드러나는 섬세한 편곡은 물론이거니와 음악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감각 또한 생생하다. 1분에서 7분을 넘나드는 스코어는 서글프고, 적적하고, 때로는 행복한 영화의 장면을 스케치한다. 이렇듯 여러 심상(心狀)을 그리면서도 영화의 주된 정서인 처연함은 잃지 않는다. 구석구석마다 '중독'이라는 영화의 제목과 딱 맞아떨어지는 불길함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렇듯 (영화의)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고 있는 음악이건만 애석하게도 영화와의 조우는 영 달갑지 못했다. 끝나버리기도 전에 싹뚝 잘라먹은 몇몇 음악들도 귀에 거슬렸지만 이건 편집의 실수로 무마할 수 있다 쳐도, 음악을 매끄럽게 받쳐줄 만큼 영화는 감각적으로 훌륭하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음악과 영화는 전혀 융화하지 못하고 각각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다. 음악의 존재감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프랑스어로 부르는 'La pluie' 같은 곡은 노을 진 세느 강을 바라보는 착각에 빠질 만큼 이국의 낯선 느낌을 잘 살려 냈고 '목장'과 '꽃밭에서', '에스키모' 역시 제목에서 바로 공간이 연상되는, 이렇듯 이미지에 충실한 곡이었지만 영화와 함께 숨쉬지 못했다. 음악은 슬픔마저 세련되게 포장해 질 자체만으로는 손색이 없었지만 영화는 여배우의 연기나 이야기 구성의 측면에 있어 음악을 따라가기 벅찼다. 영화의 '제목'과 영화의 '음반'만이 살아 있는 영화였다고나 할까.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 나오더라도 제 자리를 찾아가지 못한다면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영화를 위해 멋진 곡이 준비되어 있다 한들 영화를 제대로 타지 않으면 의미 없는 음표의 나열일 수밖에 없다. <시네마 천국>이 그랬고 <불의 전차>가 그랬던 것처럼 좋은 (영화) 음악은 좋은 영화를 통해 드러난다. 덜렁 음악, 아니 음반에 들어 간 성의만을 칭찬하고 감동하기에 음악을 듣는 우리는 그리 관대하지 못하다.

-수록곡-
1. Prologue
2. La Pluie (Bossanova Version)
3. 사계
4. 목장
5. 꽃밭에서
6. Clarinet Solo
7. 회상
8. La Pluie (Jazz Version)
9. 에스키모
10. 그네
11. 중독 (Original Version)
12. 중독 (Radio Version)
이민희(shamc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