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멀스멀 전자음의 향연이 펼쳐진다. 반복되는 전자음이 담긴 곡을 무려 18곡이나 한자리에 앉아서 듣는 게 쉽지는 않다.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음에도 대중음악에 길들여진 귀에는 낯선 음악과의 조우가 어색한 듯, 불편한 듯 다가온다. 더군다나 그 음악을 들려주는 이가 아주 대중적이었던 뮤지션이었다면.
1990년대 중후반 '내가 날 버린 이유',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로 알려진 그룹 '베이시스'의 멤버였던 정재형이 소품 집을 냈다. 프랑스에서 영화음악과 클래식을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그는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음악성에 기반을 둔 아티스트의 입지를 개척하고 있다. 이번 앨범도 프랑스에서의 감성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아니, 프랑스가 아니더라도 확실히 이곳이 아닌 저 어딘가의 정서를 담은 것만은 틀림없다. 유학 시절 터득한 음악적 지식보다 그 곳에서 느끼고 감성적으로 체득한 온기를 소품집이라는 감성의 결에 걸맞게 담아냈다.
이번 앨범은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소니 클래시컬'을 통해 발매되었다. 그만큼 클래식적이다. 이전 앨범에서 시도했던 대편성의 오케스트레이션은 피하고, 대신 피아노와 첼로, 플루트, 오보에, 호른, 비올라 등 전형적인 클래식 악기들이 소 편성으로 사용됐다. 클래식적인 요소 외에 전자음도 더해졌다. 이 부분이 참신하다. 화려한 사운드보다는 현악기, 전자음, 거기다 새소리, 물과 바람 소리 등 자연의 소리가 어우러져 어울림의 미학을 발휘한다.
유일하게 곡에 노랫말을 입힌 타이틀곡 '시간은 그대와 흘러'에서 루시드폴, 엄정화가 함께했다. 구름에 떠있는 듯한 몽환적인 연주처럼 그들 또한 한껏 힘을 빼낸 채 불러냈다. 반복적인 멜로디 라인과 조금은 우울한 듯 들리는 음성이 낯설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과 같은 곡 '꽃', 각종 전자음에 풀숲의 새소리가 한껏 어우러져 오묘한 분위기를 내는 '끝을 위한 시작', 플루트와 첼로 선율이 담겨 비장하고 엄숙한 느낌이 드는 '프롬나드(Pomenade)', 전자음으로 불꽃 튀는 짧고 강렬함이 인상적인 'Fire'와 '격투', 아름다운 멜로디 선율과 피아노, 일렉트로닉이 8분 이상 지속되는 '시작을 위한 끝'.
실은 영화 <우리 집에 왜 왔니>를 위해 쓴 곡들을 다듬어낸 것이다. 영화음악의 기승전결을 담은 듯 그래서 스토리가 담겨있는 연주음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노라면 한편의 영화를 감상한 듯 그 속에 취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잘나가던 밴드의 뮤지션이 결코 대중적이지 않은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박수 칠만 하다. 그렇지만 대중성과 음악성을 두루 겸비했던 정재형의 음반으로는 조금 아쉽다. 자기 음반과 더불어 '듣는 이들의 음반'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연이어 계속되는 클래식의 선율과 전자음의 향연은 듣기에 힘이 든다.
-수록곡-
1. Sunny Days
2. Montage
3. 연인 (Sugang`s Theme)
4. 꽃 [추천]
5. 끝을 위한 시작
6. Promenade
7. 물과 바람
8. 시간은 그대와 흘러 (Original ver.) [추천]
9. 위로
10. Fire
11. Jump
12. 격투 [추천]
13. 사건
14. 어느 가을 날
15. 연인 #2 (Byunghee`s Theme)
16. 길
17. 시작을 위한 끝 [추천]
18. 시간은 그대와 흘러 (Radio V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