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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언니네 이발관
1998

by 윤지훈

2006.12.01

1990년대 중반, 홍대 클럽 가를 중심으로 태동한 인디 음악은 새로운 활력소였다. 때마침 주류의 댄스 그룹 범람에 물린 음악계는 단비를 만난 듯 했다. '들려주기'에서 '보여주기'로 저울추가 기울던 음악계에 연주를 기반으로 한 '밴드' 형식의 음악은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인위의 산물이 아닌 자생적인 발생이었기에 다양성은 보장되어 있었다. 델리 스파이스(Deli Spice)는 기타 중심의 모던 록을, 크라잉 넛(Crying Nut)은 펑크(Punk)였으며 옐로우 키친(Yellow Kitchen)과 같은 포스트 록(Post-rock) 밴드도 있었다. 대중에게 생소한 장르였고, TV 출연이 용이하지 않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 달리자', '챠우챠우'와 같은 곡들은 큰 성공을 거둬들였다. 아래에서 출발한 이들의 스타로의 발돋움은 인디의 생명선을 연장해줄 것처럼 보였다.

애석하게도 그 열풍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음악보단 독특한 팀명에 초점을 맞춘 듯한 매스컴의 관심은 쉽게 사그라졌고, 먼저 지명도를 얻은 팀을 통한 내리사랑은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니네 이발관 역시 그 수혜를 받지 못했다. 1996년 발표된 데뷔앨범 <비둘기는 하늘의 쥐>는 국내 최초의 기타 팝(Guitar Pop)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판매고에서도 호조를 보였음에도, 두 번째 음반 <후일담>(1998)은 냉담하리만치 반응을 얻지 못했다. 결국 밴드는 해산의 길을 택했고 4년간의 오랜 휴지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후일담>의 면면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마추어와 다름없었던 데뷔작에 비하여 향상된 연주 실력은 괄목할 만한 정도였다. 앨범에서 선보인 다양한 연주 색채와 패턴은 이전의 한 가지 기타 톤만으로 승부하던 때와 질적으로 달랐다. '꿈의 팝송'은 단출한 구성의 리듬감이 돋보이고, '무명택시'에서는 스카(Ska)를 도입했다. '어떤날'은 키보드의 영롱한 연주가 한발 앞서 곡을 이끈다. 세 곡이나 수록된 연주곡은 상향 조정된 소리 만들기 능력에 대한 멤버들의 자신감을 대변한다.

그 중 약관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팀에 가입한 기타 주자 정대욱의 성장은 눈부시다. 틴에이지 팬클럽(Teenage Fanclub)과 같은 기타 멜로디를 중시하는 밴드의 팬인 그는 앨범의 기본 사운드를 조율하며 이석원이 지은 선율에 옷을 입혔다. 곳곳에 귀에 꽂히는 기타 멜로디가 넘실대었으며, 각각 6분과 7분을 넘는 '인생의 별', '청승고백'의 긴 후주를 지루하지 않게 엮어내는 구성력도 갖췄다. 기타를 잡은 지 한 달 만에 밴드의 일원이 되어 단기간에 이뤄낸 놀라운 성장은 매끄러워진 소리결의 초석이었다.

보다 견고해진 밑바탕 위에 그려낸 이석원의 멜로디는 제 짝을 만난 듯이 탄력을 받는다. 첫 곡 '유리'를 비롯해 '어떤날',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들 중 하나인 '인생의 별'까지 이석원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필살의 멜로디'가 살아있다. 그 중에서도 윤준호(델리 스파이스, 베이스)의 손을 빌려 완성한 '어제 만난 슈팅스타'는 앨범의 최고점이라 할 만하다. 그루브(Groove)가 넘치는 연주와 함께 상승 무드의 주선율은 환각적 효과를 자아내며 극적인 순간을 자아낸다. 2년 전의 그 풋내기 밴드가 맞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된다.

연주력이 향상되었다고 하지만 실상 언니네 이발관에게서 헤비메탈과 같은 화려한 독주를 들을 순 없다. 그보다 감정의 테크니션에 가깝다. 이들은 스스로를 규정한 '기타 팝'이라는 어휘처럼 감성적이고 대중적인 터치로 가슴을 겨냥했다. 그만큼 소박하고 친밀하다. 여느 청년들이 느끼는 군중 속의 외로움과('어떤날'), 열패감을('청승고백') 노래했다. 앨범 커버에 등장하는 열외, 상심, 그리고 얼굴을 가린 '봉투 소년'과 같은 일련의 코드는 당시의 나약한 청춘을 가장 빨리 공감했음을 말해준다. (커버 디자인은 초창기 키보디스트였던 류한길이 맡았다.)

1집이 인디의 시발점으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라(Do it yourself)'라는 DIY 정신을 실천한 1호로서 기록된다면, 2집에서는 그것을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더욱 구체화시켰다. 젊음의 답답함을 분노로 일갈하지 못하고 흥겨움으로 승화시킬 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송가로서 말이다. 루저(Looser)라는 잔인한 한 단어로 일축할 수 있는 세대를 누구보다 발 빠르고 효과적으로 표현한 대변인이었던 셈이다.

애초에 언니네 이발관의 시작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신선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충격이었다. 그것은 뼈대를 세운 '이석원'과 살을 입힌 '정대욱' 이라는 두 명의 브레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철저한 분업 속에서 이루어졌음에도 상호 긴장과 충돌에 의해 이러한 세공이 빚어지지 않았을까. 허나, 간판이 둘인 이발관은 결국 개점휴업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이후 정대욱은 줄리아 하트(Julia Hart)라는 자신의 밴드를 만들어 독립하게 된다.

소리 없이 사장된 이 양질의 음반은 뒤늦게 빛을 보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사람들은 이 앨범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유리', '어제 만난 슈팅스타'와 같은 곡들은 꾸준히 라디오 전파를 탔고, 재결성 소식이 들리며 밴드의 이름이 점차 입에 오르내렸다. 앨범 판매도 천천히 시동이 걸렸다.

마침내 새로운 얼굴을 대동한 3집 <꿈의 팝송>(2002)의 발표와 함께 그 결실은 맺혔다. 초도 물량 매진, 팬 운집으로 인한 사인회 취소 등등. 비록 주류의 현장은 아니었지만 그곳의 아이돌 스타를 방불케 했던 뜨거운 언더의 열광은 오랜 외면과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었다. <후일담>은 작지만 열렬했던 그 환호의 예고였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후일담으로 남아 있다.

-수록곡-
1. 유리
2. 어제 만난 슈팅스타
3. 실락원
4. 꿈의 팝송
5. 순수함이라곤 없는 정(情)
6. 다음 곡은 뭐죠?
7. 어떤날
8. 무명택시
9.
10. 인생의 별
11. 청승고백
12. 너의 비밀의 화원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보컬, 기타), 정대욱(기타), 이상문(베이스), 김태윤(드럼)
윤지훈(lightblue124@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