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인디/모던 록의 시발점이자 터주대감인 언니네 이발관이 < 가장 보통의 존재 >로 4년의 시간을 담은 음악을 선보인다. 그냥 4년의 휴식기가 아니다. 멤버들이 밝혔듯, 제작기간만으로도 3년이며 앨범 발매일을 세 번이나 연기하면서까지 후반작업에도 공을 들였다. 그렇게 완성된 다섯 번째 앨범에는 전면에 드러나진 않지만 장인정신이 곳곳에 배어있다.
< 가장 보통의 존재 >는 '반드시 1번곡부터 순서대로 차례차례 듣기를 권한다'는 멤버들의 말처럼 콘셉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뚜렷한 내러티브를 따라 다이내믹한 구조를 가진 영화는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의 주제가 계속해서 변주되는 단편들의 모음집에 가깝다. 그 내용은 '상실감', 오랜 공백기 동안 이들이 겪었을 아픔에 관한 일기와도 같다. 앨범의 서막을 여는 노랫말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보통의 존재 어디에나 흔하지 / 당신의 기억 속에 남겨질 수 없었지”
기실 정서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이발관은 언제나 살아가기의 아픔을 노래했다. 방식이 변화한 것이다. 우선 슬픈 가사와 밝은 멜로디를 배합하던 역설적인 방법론이 희미해졌고, 매 앨범의 첫 두어곡에 가장 명료한 선율을 배치하던 것에서 벗어나 가장 느리고 자조적인 목소리를 내는 '가장 보통의 존재'가 1번 타자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젠 정말 슬프게 노래한다. 그래서 신작은 지금까지 언니네 이발관의 디스코그라피 중에서 가장 어두운 색채를 띠고 있다.
이는 대중들에게 다가가기를 선언했던 지난 앨범과는 정반대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은 '대중성'이라는 단어를 전혀 고려치 않았다고 한다. 그저 하고 싶은 것만을 담았다고. 나름의 철칙이었던 영어 가사까지 담아가며 대중에 몸을 맡겼던 '순간을 믿어요'가 의외로 부진했던 것의 반발일 수도 있겠으나, 일반적인 작업과정의 몇 배에 달하는 노력을 들여가며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 작가정신의 발현임이 더 옳을 것이다.
상향평준화된 수록곡들은 그 과정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한다. 언니네 이발관의 고유 브랜드를 장식하는 것이 수려한 선율이듯, 4년의 시간을 품은 < 가장 보통의 존재 >는 10곡의 노래가 고른 멜로디를 들려준다. 한동안 곡의 흡입도가 떨어졌다고 느꼈던 이들에게는 반가운 부분이다. 분명 < 가장 보통의 존재 >는 수직적인 편차를 갖고 있던 < 꿈의 팝송 >이래로 수록곡들의 밀도가 가장 높은 앨범이다.
앨범은 타이틀곡 '아름다운 것'과 앨범 내에서 가장 도드라진 기타 사운드와 보컬 멜로디를 가진 '의외의 사실'을 중심축으로 하고 있다. 여기엔 이들이 은근히 꾀하고 있는 변화가 담겨 있다. '아름다운 것'은 첫 음부터 찔러주겠다고 누누이 얘기해왔던 것과는 달리 클라이막스에 당도하기까지 더디게 진행하며 그마저도 버스(verse)와 훅(hook)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차분한 분위기지만 명징한 멜로디만큼은 고스란히 살아있다.
특히 브라스 편곡을 사용해 기존의 백색 일변도의 작업물에서 탈피하려는 의도가 담긴 '의외의 사실'은 앨범의 하이라이트다. 전작의 '꿈의 팝송' 리메이크 버전처럼 점진적으로 시도해 온 흑색 변화가 소기의 결실을 맺은 곡으로 밴드의 향후 음악적 방향을 암시하는 곡이다. 지금껏 각 앨범의 성향을 압축해왔던'어제 만난 슈팅스타', '나를 잊었나요?', '태양 없이'를 잇는 대표트랙으로 자리할 것에 분명하다.
이외에 긴장감 넘치는 기타 배킹을 맛볼 수 있는 '너는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가?'나 간결한 구성과 후주에 배치된 악기들의 조화가 인상적인 '작은 마음', 기존 이발관 사운드가 느껴지는 '알리바이', '인생은 금물' 등의 곡들도 앨범을 알차게 만드는 빼놓을 수 없는 공신들이다. 작곡방식에 있어서 이석원과 기타리스트 이능룡의 유기적인 결합이 효과적이었음을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곡들의 면면은 훌륭하지만 인디 음악에 귀 밝은 팬이 아니라면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하기에는 분명 힘든 앨범이다. 그럼에도 < 가장 보통의 존재 >는 선주문만으로도 5000장이 동이 나는 진기한 현상을 빚고 있다. 음반 업계의 불황 속에서 4년 만에 신작을 발표한 인디 밴드, 더구나 국내에 생소한 콘셉트 앨범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딛고 일어선 쾌거이기에 작은 '사건'이라 할 만하다.
< 가장 보통의 존재 >는 작가의 빈곤 속에서 고참 밴드의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앨범이다. 열악한 제반 환경, 매체의 냉대 속에서도 들려주고 싶은 것을 정확히 보여줄 수 있는 명확한 자기 그림을 가져야 한다. 언니네 이발관은 이것을 갖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변화와 발전을 꾀하고 있다. 우리 시대엔 이런 음악 작가가 필요하다.
-수록곡-
1. 가장 보통의 존재
2. 너는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가? [추천]
3. 아름다운 것 [추천]
4. 작은 마음
5. 의외의 사실 [추천]
6. 알리바이
7. 100년 동안의 진심
8. 인생은 금물
9. 나는
10. 산들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