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가요계는 불황이지만 한 가닥 희망은 있다. 냉정히 말해 '한 가닥'에 지나지 않을 작은 움직임이지만 긴 동면에서 깨어 난 몇몇 굵직한 밴드들은 체리필터(Cherry filter)의 '낭만 고양이'를 계기로 예상을 뛰어 넘는 바쁜 행보 중이다. 발매한 새 앨범이 이틀 만에 품절사태를 이루며(초도물량 1만 5천장) 화려한 신고식을 치르고 있는 언니네 이발관 또한 올해 태동하는 '록필드'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1998년 발표한 2집 <후일담> 이후 개점 휴업을 하고 기약없는 잠정기에 들어갔던 언니네 이발관은 2001년의 반가운 재기 선언 이후 4년 만에 완벽한 새 사람, 아니 새 밴드가 되어 돌아왔다. 매번 그래왔지만 3집 <꿈의 팝송>도 리더인 이석원을 제외하고는 라인업이 확실하게 바뀌었고(기타 이능룡, 드럼 전대정, 베이스 정무진) 1집의 풋풋함, 2집의 음악적 성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새 앨범으로 수줍게 인사한다. '나를 잊었나요? 당신 앞에 서 있는 날('나를 잊었나요')'.
2집을 통해 1집 <비둘기는 하늘의 쥐>(1996)의 '발전'을 보여줬다면 3집은 지난 앨범들의 '반전'이라 할 만 하다. 밴드의 익숙한 틀로 구사하는 새 음악은 '록'보다는 '팝'적인 접근을 보인다. 객원멤버인 데이트리퍼(Daytripper, 본명 류한길)와 건반 편곡의 70% 가량을 담당했다는 새 베이시스트 정무진의 활약으로 1980년대 씬스팝 풍의 낯선 옷을 입히는가 하면('헤븐', '괜찮아'), 명료한 연주에서 벗어나 드림팝에 가까운 기타의 울림으로 사운드의 폭을 확대시켰다('안녕', '언젠가 이발관'). 때론 재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밴드가 만드는 트롯트란 이런 것? 뽕끼 진득한 '불우스타'는 잠깐의 웃음을 제공하는 휴식같은 트랙이다.
그러나 섣부르게 배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언니네 이발관은 기본적으로 기타가 중심이 되는 '밴드'이고, 이들을 키운 팔할(八割)의 멜로디 감각 또한 싱싱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발군의 멜로디를 담은 타이틀 곡 '2002년의 시간들'은 언니네 이발관의 순행을 보여주고 있으며, 온건하게 이어지는 '표정'도 특유의 장기라 할 수 있는 맑은 기타의 선율이 돋보인다. 2집 이후 정대욱을 잃었지만 새 기타리스트 이능룡은 작곡과 편곡 작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충실하게 공백을 메꾸며 수려한 연주를 들려준다.
37여분 동안 숨가쁘게 달리며 지난 시절의 감각을 고수하면서도 오랜 기간 고심했던 새로운 영역에 대한 욕심을 담아 완성한 영리한 앨범으로 돌아온 언니네 이발관. '실험'이 '유지'보다 친화력이 부족해 전반적인 균형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다소 흠이지만 둘을 절충한 빼어난 트랙 '울면서 달리기'는 양자의 팽팽한 긴장을 푸는 중재 역할을 한다. 어쩌면 이 부조화는 37분이라는 '촉박한 달리기' 시간 탓은 아니었을까? 짧은 재생시간이 못내 아쉽다.
여전히 댄스와 발라드만이 박빙의 승부다툼을 하는, 한없이 나른하고 지겨운 오랜 가뭄에 뿌려진 새로운 단비가 반갑다. 판도를 뒤엎을 만큼 막강하지는 못하지만 인기보다 실력을 우선으로 하는 몇몇 밴드들의 출현, 즉 체리필터를 선두로 2년 혹은 3년 만에 재기한 불독맨션(Bulldogmansion)과 스웨터(Sweater) 및 <꿈의 팝송>으로 돌아 온 언니네 이발관으로 정리되는 작은 성찬은 그래서 괄목할 만하다.
다만 이런 움직임이 '희망의 한 가닥'이라는 제한적 도약에 머물지 않으려면 매니아와 평단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나르시즘의 자축파티 수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당신이 반드시 따라 부르게 될 멜로디'를 만들고 음악역사에 길이 남을 '중앙의 팝송'의 기수가 되고 싶다는 욕심을 충족시키기에 '록필드'는 아직 좁기만 하다. 가수의 진정한 성공은 지지층의 추월, 그리고 무대의 확장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수록곡-
1. 헤븐 (단 한번의 사랑)
2. 나를 잊었나요?
3. 괜찮아
4. 남자의 마음
5. 울면서 달리기
6. 2002년의 시간들
7. 지루한 일요일
8. 불우스타 (不遇Star)
9. 안녕
10. 표정
11. 언젠가 이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