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이발관? 한 번 들어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이름이다. 밴드 이름이라 하기엔 너무 특이하고, 그래서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드디어 그 고유명사에 대한 당혹이나 호기심을 접을 순간이 온 것 같다. 1994년의 대한민국 인디 씬이라는 험한 밭에서 시작을 함께 했고 오랜 세월을 거쳐 현재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며 입지를 굳힌 언니네 이발관은, '그런 밴드'가 출현했다는 반짝 이슈가 아니라 이제는 '이런 음악'을 새로 발표했다고 소개할 수 있을 오늘의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음악에는 서울 홍대를 기점으로 한 인디 음악의 어제와 오늘, 즉 태생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묻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특한 이름과 자작곡에 바탕한 이른바 DIY 시스템, 그리고 방송보다는 공연에 몰두해 생명력을 유지하는 생존의 방식 등이 이를 대변한다.
인디의 아이콘 언니네 이발관이 최근 발표한 4집 <순간을 믿어요>는 그 씬의 요즈음 추세인 '탈 인디' 경향을 제대로 압축한 음반이다. 델리 스파이스(Deli Spice)의 '고백'이 그랬던 것처럼 출중한 연주력을 기반으로 멜로디의 호소력을 극대화했다. 더 이상 그들을 지탱하는 무대는 홍대의 어두운 클럽이 아니다. 밴드로서의 무게, 음악의 진지함과 그들 고유의 색을 잃지 않으며 보다 넓고 큰 무대를 지향하고 있다. 공식 홈페이지에 적혀 있는 쇼케이스 소식과 빠듯한 인터뷰 스케줄, 신보 발표 후 바로 갖는 큰 규모의 단독 공연이 이를 말해준다. 물론 변화의 뚜렷한 조짐은 그들의 빼곡한 일정보다는 음악에 더욱 자세하게 드러난다.
파워풀한 연주를 바탕으로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하는 '바람이 부는 대로'를 시작으로 거침없이 질주한다. 강렬한 기타 리프가 인상적인 '태양 없이', 2집 수록곡을 펑키 버전으로 재해석한 '꿈의 팝송', 생글생글한 '#1' 등은 빈틈 없이 꽉 짜인 사운드로 풍성한 울림을 전해주는 노래들이다. 보컬 이석원의 목소리는 다소 희미해졌지만 연주는 전보다 훨씬 선명해졌다. 이들보다 템포를 늦춘 아담한 타이틀 곡 '순간을 믿어요', 담백한 연주의 '셋넷'과 '키다리 아저씨', 싸이키델릭한 기타 톤을 확인할 수 있는 '사라지지 않는 슬픔과 함께 난 조금씩' 등도 주목할 만 하다. 비슷한 분위기의 곡이 없는 난배열의 구성이지만 후렴구의 멜로디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이들의 공통점이며 이는 결국 <순간을 믿어요>라는 한 장의 음반에 모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1집 <비둘기는 하늘의 쥐>의 신선함, 2집 <후일담>의 성숙함, 3집 <꿈의 팝송>의 간결함을 거쳐 4집 <순간을 믿어요>로 만나는 지금의 언니네 이발관은 지난 음반들의 특색과 장점을 종합해 확장이라는 더 넓고 새로운 길을 향한다. 타이틀 곡으로 낙점한 '순간을 믿어요'에서 드러나듯 멤버 모두가 음반에 참여해 연주와 작곡의 화합을 강조하면서 보다 쉽고 명징한 가락을 좇는다. 한편 언니네 이발관의 탄생을 함께 한 밴드의 정신적 지주 이상문의 죽음은 인디 씬 특유의 어둠의 정서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도 더 많은 대중을 만나기 위한 약속이 담겨있다. 그의 추모곡인 '천국의 나날들'에 담긴 기조는 슬픔이어도, 매끈한 멜로디를 통해 희망적인 극복을 노래한다.
1994년 출발한 언니네 이발관은 올해로 결성 10주년을 맞는다. 기나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멤버가 바뀌고 때로는 음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도 했던 밴드의 다사다난한 여정이 3집을 통해 안정을 찾았고, 그로부터 2년 만에 발표한 4집 <순간을 믿어요>로 만나는 오늘의 언니네 이발관은 완연한 중견 밴드로서의 품위와 완성을 자랑한다. 그런 지존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그들 노랫말대로 순간을 믿으며 메인 스트림의 활기와는 다른 개성으로,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갈고 닦은 실력으로 이제 보다 많은 동반자를 찾아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지난 10년의 기록과 오늘의 전진이 함께 담긴 한 장의 새 음반과 함께.
-수록곡-
1. 바람이 부는 대로 (작사 : 이석원 / 작곡 : 이석원, 이능룡)
2. 태양 없이 (이석원 / 이석원, 이능룡)
3. 셋넷 (작곡 : 정무진, 이능룡)
4. 꿈의 팝송 (이석원, 이석원)
5. 순간을 믿어요 (이석원 / 이석원, 정무진)
6. 사라지지 않는 슬픔과 함께 난 조금씩 (이석원 / 이석원, 이능룡)
7. #1 (이석원 / 정무진)
8. 깊은 한숨 (이석원 / 이석원, 이능룡)
9. 키다리 아저씨 (이석원 / 정무진)
10. 해바라기 (작곡 : 이능룡)
11. 천국의 나날들 (이석원 / 이석원, 이능룡, 정무진)
프로듀서 : 언니네 이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