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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스토리 OST
신해철
1996

by 배순탁

2005.03.01

1990년대 초 중반의 한국 음악계는 1980년대만큼이나 풍요로웠다.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메이저의 음악 작가'들이 메인스트림이라는 큰 무대에서 능동적 재기를 맘껏 발휘할 수 있었던 그 시대는 황무지와 같은 현재에서 돌이켜보면 가히 '드림 랜드'라 부를 만 하다.

그 시절 그 대지 위에서는 고급 발라드와 소란스러운 힙 합, 성난 하드 록과 경박하지 않은 댄스 등이 공평히 지분을 추수, 상생(相生)과 공생(共生)의 기치를 확립했음은 물론 장르마다 그것을 견인했던 대표주자들을 배출, 지하 세계가 주도한 밑에서부터의 반란이 아닌 '지상에서 일구어낸 음악적 쾌거'로서 경이의 꽃을 활짝 피웠다. 국산 발라드의 전범을 구현하며 황제의 반열에 오른 신승훈과 듣기에는 쉬우나 부르기에는 어려운 댄스 레퍼토리들로 발군의 대중적 포용력을 과시한 김건모 등이 우선 이를 증명해준다.

허나 둘 모두가 비교적 주류 친화적이고 '아버지 세대도 들을만한' 음악을 장수 비결로 선택한데 반해 서태지와 신해철은 메탈과 테크노, 힙합과 하드코어 등, 기성세대와 대립각을 이루는 소란스러움을 내세워 피 끊는 청춘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둘 가운데 신해철과 그의 자아인 넥스트(N.EX.T) 음악의 특장은 그때까지 국내 대중음악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뮤직'을 간판으로 내세웠다는 점.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장점은 때론 아킬레스건이 되어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의 안티 세력이 그를 공격하는 주된 이유, 즉 '잘난 체하는 음악'으로 들릴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신해철은 지금도 서태지와 함께 가장 견고한(?) 안티 베이스를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신해철의 이러한 '지적' 측면은 때때로 감성 코드와 정확히 접속, 동시대의 누구와도 대별되는 그만의 청취효과를 방사했다. 군에서의 고난과 대마초 사범으로 낙인 찍혀 당해야 했던 사회적 멸시를 음악적 분노로 풀어낸 < The Being >(1994)과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 등을 영입하며 슈퍼 밴드의 초석을 닦았던 < World >(1995) 등이 이를 잘 대변해주는 넥스트의 걸작들이다.

김세황의 기타 연주곡 'Main theme from Jungle Story-Part 1'으로 문을 여는 작품 < 정글 스토리 >는 신해철이 걸어온 '골든 로드' 중에서도 천연히 빛을 발하는 정점의 순간이었다. 솔로 프로젝트이자 윤도현이 주연을 맡은 동명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제작된 음반은 신해철 음악이 어떤 지점에서 가장 강력한 공기를 분출하는지를 명증하며 당시 국내 록 마니아들로부터 우세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언급한 넥스트 멤버들에 전람회의 김동률 등, 이른바 신해철 사단이 모조리 참여한 일종의 '패밀리 개념' 앨범이었지만 신해철은 작품의 멱통을 결코 놓치지 않는 집중력을 발휘하며 시장과 평단 모두에서 승전고를 울렸다. 우선 김세황과 김동률이 각각 기타와 피아노로 풀어낸 메인 테마의 수려한 멜로디 전개부터가 그 깊이의 남다름을 과시, 평균 대중들의 심금을 파고들었다.

두 곡 외의 다른 트랙들, 예를 들면 비장미 넘치는 파워 발라드 '절망에 관하여', 강성의 헤비 록 '백수가', 다이내믹한 구성과 세련된 화음이 앙상블을 이루어낸 '70년대에 바침' 등에서도 그간 신해철 음악에서 다소는 결여된 듯 보였던 '낭만성에의 천착'은 여실히 드러났다. 마치 무한궤도 이후의 솔로 시절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푸짐했던 선율 잔치를 통해 팬들은 그의 인텔리적 면모를 잠시 뒤로 물리고 감성의 회복을 미리 예약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전까지 그를 정의했던 냉혹한 격분과 광기의 음악이 아닌 온도계의 수치를 올려주는 따스한 '온기의 음악'이었다.

음반의 가치와 품격을 다단계로 올려준 일등공신은 단연 < World >의 커튼다운 트랙 'Love story'에서 이미 그 출중한 솜씨를 시범한바 있었던 기타리스트 김세황이었다. 언급한 첫 곡 'Main theme from Jungle Story-Part 1'에서 마치 천의무봉을 향해 솟구치듯 연주하는 그의 기타 솔로는 이 땅에 젊은 기타 히어로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시그널로서 감동의 근저를 뒤흔들 만큼 강력함을 뽐냈다. 특기인 속주를 자제하면서도 곡이 지닌 충일한 감정의 그릇을 극정(極頂)의 상태로 묘사해낼 줄 아는 디테일한 표현 능력이 그 주(主)동인이었다.

이 외에 라디오 전파를 독식한 시원한 록 댄스 '아주 가끔은', 산울림의 오리지널을 비틀어 재해석한 '내 마음은 황무지', 국악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을 드러낸 인스트루멘탈 넘버 'Jungle strut' 등, 빠지는 곡이 없을 정도로 신해철 음악 역사상 가장 이지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밸런스 트랙'들이 음반을 수놓고 있었다.

한마디로 앨범은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를 끊임없이 굴삭했던 한 아티스트 피땀 어린 노력의 결정체였다. 1년 뒤 신해철은 < Lazenca - A Space Rock Opera >(1997)를 통해 < World >에서 그 단초를 제시했던 특급 레코딩과 믹싱을 통한 '사운드 품질의 혁신'을 완성하며 대한민국 록 히스토리에 또 하나의 선명한 발자취를 남긴다. (비록 '곡'을 놓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넥스트의 해산은 그러나 주변 모두를 허탈감에 빠지게 할 만큼 쇼킹한 뉴스였으며 새 동료들과 함께 발표한 < 개한민국 >(2004) 역시 그가 곧추세웠던 과거의 영광들에 비해서는 실망스러운 텍스트임이 역력했다. 그래서 더욱 그리운 앨범이 바로 < 정글 스토리 >이며 그 무렵 그의 창조성은 절정의 화염을 내뿜으며 레드 카펫 위로 질주를 거듭했다.

신해철 왕조가 전성기에 연착륙했음을 알리는 예광탄으로서 그 임무를 완수했던 음반. 동시에 그것은 앞으로 그가 걸어야 할 내리막길에 대한 쓸쓸한 전조이자 예고편이기도 했다. 본 레코드의 진정한 키워드는 바로 그 양면성이라고 본다. 영화가 참패했으면서도 여전히 정글 스토리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 역시 음악 때문일 것이다. 망한 영화, 흥한 음악! 그 슬픈 언밸런스가 도리어 감동의 밸런스라는 사리를 남긴다.

-수록곡-
1. Main Theme From Jungle Story
2. 내마음은 황무지
3. 절망에 관하여
4. Main Theme From Jungle Story
5. 백수가
6. 아주 가끔은
7. Jungle Strut
8. 70년대에 바침
9. 그저 걷고 있는거리
배순탁(greattak@iz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