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이 지났다. 2014년 10월 27일, 대중음악사를 넘어 시대를 대변했던 음악가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날. 불과 여섯 달 전 차가운 바다 위로 식어갔던 꽃다운 아이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무기력함에 전 국민이 침울에 빠져있던 시기 들려온 안타까운 소식은 비통에 무게를 더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소신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예술가를 향한 따끔한 일갈, 제도와 사회의 허점 혹은 그 위에 군림하는 인종을 직격하는 신랄함, 외로운 선배와 애쓰는 후배에게 전하는 자기 방식의 애정어린 조언,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담긴 아름다운 음악. 분명 그간 해온 방식으로 변함없이 울림과 지각을 남겼으리라.
오늘날 변화한 사회 앞에서 과하다고 생각했던 일말의 지점과 다분히 정치적이라고 느껴졌던 순간들이 쇄신의 시작이자 태동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두 자릿수의 해가 지났어도 여전히 그와 같은 대중문화인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앞으로도 나오지 못할 공산이 크다. 누구나 그처럼 말할 수 있지만, 아무나 힘을 얻을 순 없다. 그렇다면 신해철은 어떻게 우리의 삶에 새겨졌을까? 그가 남긴 족적이 너무나 넓어 면면히 다룰 순 없지만, 쉬이 잊히지 않는 까닭과 그리워하는 마음의 발로를 생각해 본다. 대중음악사에 획을 그은 그의 작품을 해체하고 분석하여 칭송하는 일도 중요하나 ‘10주기’라는 상징성에 기대 그동안 받은 기쁨과 위로를 나눠보고자 한다.
신해철의 등장을 알린 1988년 < MBC 대학가요제 > 대상곡 ‘그대에게’는 악기 사용과 구성, 곡 전개와 멜로디, 전조와 테크닉까지 5분 안에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각오로 철저한 계산하에 쓰여졌다. 인기 대열에 오른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솔로 1집 <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 속 동명의 곡과 함께 사랑을 받았던 ‘안녕’에는 국내 대중가요 최초의 영어 랩이 담겼고 이듬해 발매한 2집 < Myself >는 앨범 전체를 직접 주조한 작가주의적인 모습과 ‘재즈 카페’, ‘길 위에서’ 등 개별 곡의 우수한 완성도는 물론 컴퓨터 프로그래밍(MIDI)을 통해 제작된 국내 최초의 음반이라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후 밴드를 향한 열망을 감추지 못하고 결성한 넥스트의 걸작과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며 스펙트럼을 넓힌 솔로 음반, 프로젝트 그룹 노땐스와 비트겐슈타인 활동 등 어느 한 곳에 묶여있지 않았던 자유로움은 후대 음악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세상을 떠날 적 신해철의 나이와 비슷해진 세대가 그에게 받았던 위로와 감동은 무엇이었고 어디서 온 것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철학자는 시대를 통찰하는 혜안과 사유를 글로 남긴다. 종종 ‘노래하는 철학자’라는 수식을 그의 이름 앞에 붙이는 이유 또한 그가 남긴 노랫말의 깊이가 철학자란 낱말에 그리 모자라지 않기 때문일 테다. 신해철의 작품을 조목조목 풀어헤치는 일은 어쩌면 음악가나 평론가의 몫일 뿐 일반 대중은 음악을 듣고 각자의 마음속에 새기면 그만이다. 신해철의 문장은 그렇게 청춘을 넘어 모든 세대를 어루만졌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中 -
1989년 발매한 무한궤도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 <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 속 동명의 곡 중 일부다. 죽음 앞에 홀로 선 유약한 인간에게는 두 가지 자각이 필요하다. 하나는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지막을 직감한 순간 밀려드는 후회에 백기를 드는 일이다. 신해철은 말한다. 그러니 후회 없이 살라고.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신해철의 노랫말이 가진 가장 큰 특장점은 모든 영역을 다뤘다는 점에 있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의 기억, 어머니 혹은 아버지와의 관계, 부모로서의 이야기, 꿈을 좇던 시절과 현실을 살아가며 잃어버린 이상,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와 잠시 쉬어가도 된다는 용기, 서서히 지워져 가는 소년성, 각종 제도와 사회 비판, 만남과 이별, 우정, 노동, 사랑, 역사, 환경, 생명, 죽음 등 그가 노래하지 않은 분야는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큰 소리로 외치면
흐릿하게 눈물 너머 이제서야 잡힐 듯 다가오는 희망을 느끼지
그 언젠가 먼 훗날에 반드시 넌 웃으며 말할 거야 지나간 일이라고”
- ‘Hope’ 中 -
살아가며 누구나 한 번쯤은 부딪혀야 할 벽에 맞닥뜨리게 될 때나 너무나 당연하게 바라보았던 개념과 가치를 다시금 곱씹어 볼 때, 신해철의 음악은 당신을 기다린다. 어떠한 상황을 마주해 어려움을 겪든 간에 최소한 한 곡은 이미 경험해본 일인 듯 태연하게 말을 걸어 온다. 약관의 나이에 데뷔해 일찍 철이 들었던 한 청년의 어울리지 않는 성숙함이라 자르기엔 그 깊이가 실로 대단하다. 마흔일곱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25년의 시간 동안 선보인 무수한 명곡이 한결같이 대중을 위로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도둑질을 했는데 용서를 해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는 죄지은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인정해달라는 거죠.
누가 누구에게 베푸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 1996년 넥스트 < My World Tour > 中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에 앞서 -
1995년 발매한 넥스트의 세 번째 앨범 < The Return Of N.EX.T Part2: The World >의 타이틀 곡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는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다. 동성동본 금혼법의 부당함을 애절한 가사로 풀어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을 위로한다. 외에도 ‘Komerican blues’와 ‘Money’, ‘The age of no god’, ‘70년대에 바침’은 빠른 속도만을 답으로 받아들였던 우리 사회를 꼬집은 대표곡으로 남아있고, 그 정수는 모름지기 2004년 발매한 넥스트 5집 < The Return Of N.EX.T Part3: 개한민국 >이다. ‘아! 개한민국’과 ‘Dear American’, ‘서울역’ 그리고 ‘아들아, 정치만은 하지마’의 가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충격을 선물하며 21세기에 들어 더욱 신랄해진 비판 수위가 오롯이 담겨있다.
신해철은 분명 본인의 소신을 말할 줄 아는 자였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만큼 잃을 게 뻔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당당히 자신을 드러냈다. 그 분야는 비단 음악뿐만이 아니었다. < 백분토론 >에 그가 출연한 회차는 총 열 차례가 되지 않지만 대중은 해당 프로그램에서 신해철의 모습을 깊이 기억한다.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서 뭇매를 맞던 그는 냉철하고 논리적이었으며 유머를 겸비한 논객이었다.
예컨대 대마초 비범죄화, 학교 내 체벌 금지, 간통죄 폐지, 사이버 모욕죄와 같이 쉽사리 입장을 펴기 난처할 법한 주제에도 주저 없이 뜻을 펼쳤다. 앞서 언급한 동성동본 금혼법이 결국 폐지된 것처럼 간통죄는 2015년 62년 만에 삭제되었고, 2010년 각지 교육청은 모든 학교에서 체벌을 전면 금지했다. 모두가 신해철의 소신 덕이라 말할 순 없지만 당시에도 또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행보를 걷는 대중예술인은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로 기억된다.
“소년아 저 모든 별들은
너보다 먼저 떠난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란다
세상을 알게 된 두려움에 흘린 저 눈물이
이다음에 올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지”
- ‘해에게서 소년에게’ 中 -
눈 깜짝할 새 흘러간 10년. ‘50년 후의 내 모습’을 노래하던 그는 일찍 곁을 떠났지만 남기고 간 아름다운 음악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불멸’하고 있다. 그가 싸워온 세상의 장벽은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듯 보였으나 결국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새롭게 쌓아 올린 단절과 불통이라는 또 다른 장애물에 사회는 신음한다. 아직 이 세상은 그의 한 마디가 필요하다.
10월 26일과 27일 양일간 1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 마왕 10th: 고스트 스테이지 > 공연이 열린다. 넥스트 멤버들을 비롯해 생전 진하게 교류했던 뮤지션 선후배가 합심해 그의 명곡을 재연하는 한편 방송에선 각종 특집 편성과 더불어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그를 기리고 라디오에선 여느 때보다 그의 음악이 많이 들려온다. 신해철, 그는 그만큼 우리네 삶에 깊이 침투한 분명 멋진 인간이었다. 이참에 그가 두고 간 빛나는 명곡들을 다시 들어보자. 생각지 못한 지점에서 당신에게 꼭 필요한 한 마디를 건네며 함께 고민을 품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