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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way 61 Revisited
밥 딜런(Bob Dylan)
1965

by 임진모

2001.02.01

한 손에는 노랫말의 혁명, 다른 한 손에는 포크록

밥 딜런 이전에 사람들은 대중가요의 가사의 수준을 그 때의 쾌락과 슬픔을 담는 정도로만 여겼다. 심각하거나 어려운 것은 노래에 맞지 않는 줄 알았다. 밥 딜런은 이처럼 순간의 감각에 영합하는 가사 풍토에 종지부를 찍고 팝송의 노랫말을 '하루살이'로부터 '성경'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록 평론가 데이브 마시(Dave Marsh)는 이 앨범을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최고라고 평하면서 “이 무렵 그의 영향력은 너무도 확산되어 정말 수천의 사람들이 그의 언어 하나 하나에 매달리는 실정이었다”고 말했다.

65년 8월 딜런의 전성기 때 발표된 이 작품이 가지는 의의는 바로 데이브 마시가 지적한 언어 즉 가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딜런은 이 음반을 통해 '운율을 지닌 게티스버그연설'처럼 대중음악 분야에서 곡 만드는 사람의 두뇌를 자각시켰다. 작사자들은 보다 신중히 그리고 철학적으로 가사를 써야 했다.

딜런의 언어는 그야말로 철학이요, 사상이었다. 감상자의 가슴을 찌르는 통렬함을 지녔고 초현실적이었으며 이전의 대중가요에서는 목격할 수 없는 사고의 깊이를 간직했다. 정확한 해독이 어려울 만큼 의미가 다중적이고 복잡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가 인터뷰 때마다 가사를 쓴 배경을 모호하게 설명하여 판독의 어려움은 더 증폭되었다.

일례로 여기 수록된 '여왕 제인'(Queen Jane approximately)에서의 제인이 혹시 당시 연인관계로 소문난 존 바에즈가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했고 한 뉴욕 시민은 '폐허의 거리'(Desolation row)를 정확히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면 포상하겠다는 광고를 지하신문에 내기도 했다.

이 앨범을 대표하는 곡 중 하나인 '깡마른 자의 노래'(Ballad of a thin man)의 유명한 한 구절 '여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요, 존스씨?'(Something is happening here. But you don't know what it is, do you Mr. Jones?)도 그렇다. 기성세대의 낡은 사고에 대한 비아냥으로 시위대 피킷의 슬로건이 된 이 대목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미스터 존스를 당시의 존슨대통령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정작 딜런은 “당신은 그를 알고 있지만 그 이름으로는 아니다”라고 언급, 특정인을 밝히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곡은 물론 65년 7월에 싱글로 발표되어 미국 차트 2위, 영국 차트 4위에 오른 그의 생애 최대 히트곡 '구르는 돌처럼'이다. 이 곡이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곡으로 기록되는 이유는 포크가 아닌 록의 편성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크의 영웅인 그가 통기타를 놔두고 일렉트릭 기타를 쥐었다는 것은 포크 팬들에게는 충격이자 일종의 배신이었다.

이 곡이 뜨기 직전인 5월 딜런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했다가 분노한 관객들로부터 계란과 야유세례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일렉트릭 기타가 지배하는 록이야말로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젊음의 영원한 청각 문법'임을 확신했다. 그것은 바로 밴드의 힘찬 사운드로 미국 땅을 공습해온 영국의 비트 그룹, 바로 비틀스와 애니멀스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밥 딜런은 71년에 이 무렵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어린 10대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그래서 곧 시들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속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명백했다. 그들은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틀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가 비틀스처럼 일렉트릭 기타를 치고 드럼을 울려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 결과물이 '구르는 돌처럼'이었다. 딜런은 록의 에너지를 담아내기 위해 녹음 작업시 의도적으로 작렬하는 드럼 사운드 곁에서 연주하고 노래했다.

버즈(Byrds)에게 그가 써준 기념비작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과 함께 나중 이 곡은 모든 게 역사와 전설이 되었다. 평론가들은 포크와 록을 뒤섞은 이 '뉴 뮤직'을 포크록이라고 명명했다. '구르는 돌처럼'은 이를테면 이후 70년대에 주요 음악 어법이 된 포크록의 개막 축포였다.

문제는 그가 통기타만 처분한 것이 아니라 초기의 저항성, 정치적 행동성을 폐기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실제로 '나의 뒷 페이지'(My back pages)라는 곡에서 '그 땐 난 너무 늙어 있었지. 난 그 때보다 지금 더 젊어 있지'하며 스스로 자신의 행동성을 부정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의 스트레이트한 표현이 아닌 '내적 성찰에 의한 의식혁명'을 주장하는 쪽을 택했다고 생각된다. 실은 일반 대중의 속단처럼 저항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구르는 돌처럼'과 '깡마른 자의 노래'는 느낌에 따라 초기 프로테스트 송보다 오히려 더욱 저항적 메시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연주는 나중 전설이 된 마이크 블룸필드(Mike Bloomfield)가 기타를 맡았으며 바비 그레그가 드럼을, 폴 그리핀이 피아노를, 러스 사바커스가 베이스를 맡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알 쿠퍼(Al Cooper)가 하몬드 오르간을 연주한 것도 이 곡이 남긴 유명 에피소드다.

타이틀에 사용된 하이웨이 61은 그의 고향인 미네소타 유리치의 북쪽에서 미네아폴리스, 세인트루이스, 멤피스를 거쳐 뉴 올리언스까지 달리는 고속도로를 가리킨다. 어린 시절 꿈을 안겨준 이 도로를 내걸어 그는 '과거로 돌아가서 미래를 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과거는 무엇이었던가. 지금하고 있는 포크 음악이 아니라 한 때 그를 열광하게 했던 50년대의 로큰롤이었다. 그는 빌 헤일리의 '하루 종일 록을'(Rock around the clock)을 듣고 '바로 저거야!'라고 무릎을 쳤으며 음악 활동을 시작하면서 '엘비스보다 더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록으로 가야 했다. 비틀스가 그 감추어진 욕구를 자극했다. 마침내 제대로 출발선을 잡은 밥 딜런의 '록 드라이브'는 숨가쁘게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미네소타의 하이웨이 61만이 아닌 세계 곳곳의 도로를 달리며 록의 새로운 씨앗을 뿌렸다. 이제 딜런의 지구촌은 저항이 아닌 '록의 지구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부록'
또 다른 밥 딜런의 명반들

<블론드 온 블론드>(Blonde On Blonde)

이 앨범은 <다시 찾은 하이웨이 61>에 이어 66년에 발표된 것으로 음악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천재라는 말이 붙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비오는 날의 여인'(Rainy day woman #12&35) '난 당신을 원해'(I want you) '단지 여성처럼'(Just like a woman) '레퍼드스킨 필박스 햇'(Leopard-skin pill-box hat) 등 무려 4장의 싱글이 나왔다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중적인 아티스트로서의 면모가 더욱 완연해졌다.

이미 전작의 '폐허의 거리'에서 실험했듯 그의 예술성은 11분에 가까운 '저지의 슬픈 눈을 가진 여인'(Sad eyed lady of the lowlands) '조앤나의 시각'(Visions of Johanna) '다시 멤피스 블루스로 자동차 안에 갇혀'(Stuck inside of mobile with the Memphis blues again) 등 3곡의 긴 곡에서 꽃을 피운다.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이 가져다준 충만한 행복감 때문일까? 이 앨범은 동시에 가사의 심오함이 더욱 확대된 앨범이다. 미국인들도 수록곡들의 의미를 잘 모른다. 난해의 극치. <다시 찾은 하이웨이 61>과 함께 밥 딜런 예술의 결정판.

<존 웨슬리 하딩>(John Wesley Harding)

창작의 절정기였던 60년대 딜런의 앨범은 모두 걸작의 영예를 소유한다. 이 앨범도 역시 명반의 대열에 선다. 그러나 본작은 <다시 찾은 하이웨이 61>나 <블론디 온 블론디>와는 색조가 전혀 다르다. 그는 66년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와 그에 따른 은둔을 계기로 다시 어쿠스틱의 세계에 천착하면서 동시에 포크와는 다른 컨트리 음악에 손짓하게 된다. 이 앨범은 실제로 컨트리의 메카 내시빌에서 녹음했다.

대부분의 수록곡이 컨트리 음악 청취에 따른 영향으로 전해지고 있다. 60년대 말 너도나도 덩치 큰 소리와 목적적인 지향을 보이고 있을 때 딜런은 포크와 컨트리 음악의 생래적인 '최소주의 미덕'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 앨범의 시대적 의의 가 여기에 있다.

'어느 날 아침 바깥에 나갔을 때'(As I went out one morning) '방랑자의 도피'(Drifter's escape) '올 얼롱 더 워치타워'(All along the watchtower)가 돋보이는 소품들. 특히 '올 얼롱 더 워치타워'는 지미 헨드릭스의 일렉트릭 기타 버전으로 록의 클래식이 됐다. 컨트리의 경향이 더욱 농후해진 68년 앨범 <내시빌 스카이라인>(Nashville Skyline)의 길을 안내한 작품.

<지하실의 테입>(Basement Tapes)

이 앨범은 67년 여름 그러니까 온 세상이 히피의 물결로 시끄러울 때 더 밴드(The Band)라는 이름의 당시에는 전혀 무명의 밴드와 행한 '비밀의 그리고 자유로운 세션'이 음반화된 것이다. 이 세션 녹음 테입은 알게 모르게 해적판으로 나돌다가 75년에 가서야 공식 앨범으로 빛을 보았다. 이를테면 '불법 복제가 가져온 결실'이랄까? 딜런과 더 밴드의 로비 로버트슨(Robbie Robertson) 등이 번갈아 노래하는데 평론가 그레일 마커스는 '총 여섯 명의 완벽한 파트너십'과 '고전성'이 이 앨범의 생명이라고 일컬었다.

음악의 순수함과 자유로움이 이렇게 피부에 와 닿는 앨범도 없을 것이다. '로 앤드 비홀드!'(Lo and behold!) '오렌지 주스 블루스'(Orange juice blues) '무의 축복'(Too much of nothing) 그리고 역시 딜런의 곡이며 나중 더 밴드의 걸작 앨범 <빅 핑크에서 만든 음악>(Music From Big Pink)에 실려 고전이 된 곡 '분노의 눈물'(Tears of rage)이 전하는 딜런의 보컬은 어느 앨범에서보다도 자연스럽다. 단지 흠이라면 우리에겐 수록곡들의 미국적 냄새로 인해 친근감이 떨어진다는 점. 하기야 그것이 우리에게는 딜런 앨범 전체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총 24곡의 더블 앨범.
임진모(jjinmo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