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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가리온(Garion)
2005

by 한동윤

2006.12.01

갈기 검은 백마는 그렇게 오랜 세월 유시무종 달려왔건만 생기 가득해 견뢰한 눈빛은 지칠 줄 모른다. 그 말(馬)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지금 같은 속도로 달려나갈 만큼 튼튼한 다리를 갖고 있으며 영민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모습이 확실히 각인되는 인물이기에 '언더그라운드의 거성', '한국 힙합계의 큰 형님'이란 귀에 박혀온 수식은 이제 가리온과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었다.

가리온은 클럽 마스터플랜(Master Plan)을 중심으로 공연을 하며 절차탁마, 이내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얻었고 팀 결성 6년만인 2004년 데뷔 앨범 < Garion >을 발표하게 된다.

< Garion >에 대한 짧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팀의 프로듀서이자 디제이였던 제이유(JU, 본명 : 최재유)가 만들어낸 둔탁하고 어두컴컴한 비트와 간헐적인 스크래치 연주가 곁들여진 무게감 있는 음원 바탕에 엠시(MC) 나찰(羅刹, 본명 : 정현일)과 메타(Meta, 본명 : 이재현)가 주고받으며 거침없이 흐르는 래핑, 은유와 비유가 넘실대는 현실적이며 비판적인 내용의 가사는 하드코어 랩의 정형이었고 우리나라 힙합 클래식 격으로 추앙받는 앨범이 되었다.

그리곤 마치 2년을 꾹 채우려고 했던 것처럼 긴 시간을 감감무소식으로 보낸 가리온-메타는 디제이 손(DJ Son)의 < The Abstruse Theory >(2004), 45RPM의 < Old Rookie >(2005) 등의 앨범에 참여하거나 공연으로 이름과 얼굴을 비췄지만 나찰은 건강 문제와 여러 상황 탓에 활동이 흐릿했다-이 전한 희보는 섭섭하게도 정규 앨범이 아니었다. 2005년 10월 출시된 싱글은 '무투(武鬪)', '비밀의 화원', '약속의 장소' 세 곡을 담았고 1집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를 갖춘 음악이었으며 한 달여의 터울을 두고 내온 새로운 싱글 <그 날 이후> 또한 그랬다.

<그 날 이후>는 <무투(武鬪)>와 싱글로서 음반의 형태를 같이하며, 가리온 자신과 국내 힙합에 여러 가지 의미와 새로운 동향을 안겨다 준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첫째는 가리온의 하드-에지드(hard-edged) 힙합으로부터의 일탈이다. 팀의 컬러를 규정짓는 데 큰 축을 담당한 것은 디제이 제이유의 주도하에 제작되는 단단하면서도 칼날같이 날카로운 비트라고 할 수 있으나 그의 탈퇴로 1집에서 듣던 강렬한 사운드는 지속되지 않게 됐다. 그런 방식의 구성을 사모하는 팬들에게는 아쉬운 일일 수 있겠지만 이는 제작에 있어 좀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 두기도 하는데, 단일한 형식으로 묻힘이 아니라 외부 프로듀서와의 협력 작업으로 더욱 다양한 스타일이 나오기도 할 것이고 두 엠시가 지휘자가 되어 색다른 구상으로 음악을 만들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거는 파워 플라워(Power Flower)가 참여한 '그 날 이후'와 메타가 프로듀싱한 '소문의 거리'가 적당하다. 전자는 네오 소울 밴드 파워 플라워의 연주로 꽤 서정적이고 반들반들하며-연주곡만으로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가사도 < Garion >에 수록된 곡들과는 전혀 다른 사랑 얘기로 채우고 있다. 후자는 어쿠스틱 기타와 비트박스만으로 반주를 만듦으로써 기존의 힙합과는 사뭇 다른 신선한 소리틀을 세워 특별하다. 이것은 '소문의 거리' 끝 부분에 나오는 설정해놓은 인터뷰 모습처럼 가리온이 하드코어 힙합에서 완전히 이탈했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기에 전략적 일탈이라고 봄이 나을 듯하다.

둘째로는 이처럼 거친 면을 잠시 거두고 말랑말랑함을 앞세워서 대중을 향한 발걸음의 폭이 확연히 넓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으리라. 마니아들에게는 한 동네에서 잘 나간다는 형들처럼 당연히 각인된 가리온이었지만 '텔레비전만을 의존하며 힙합 팬이라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머나먼 우주 어느 소행성의 이름만큼이나 낯선 그들이었다. 그러나 풍조에 어울리는 사운드와 멜로디 라인의 도입은 영상매체에 매달린 다수 대중을 가리온에게 찾아오게 한 향기가 됐다.

셋째로 한 음악 웹진에서 진행된 리믹스 대회와 연관해, 변방에서 칩거하던 비트메이커들을 안으로 끌어들인 작품이라는 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무투(武鬪)>와 <그 날 이후>에 수록된 곡들의 아카펠라 음원과 자기가 만든 비트를 섞어 재창조하는 경연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 대회는 음악 만들기가 자의이든, 주변의 여건 때문이든, 자기만족을 위한 취미 생활이나 소수에게 들려주던 습작에 그쳐야 했던 비트메이커와 프로듀서들에게 이름을 알릴 기회가 되었으며 그들에게 원기를 불어 넣었다. 이는 나아가 변변한 스튜디오가 아닌 곳에서라도 편집 소프트웨어나 간단한 미디 모듈만을 이용해서도 괜찮은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인식 확산에 더 큰 불을 지폈다.

마지막으로 힙합의 싱글 바람을 들 수 있다. 물론 <그 날 이후> 이전에도 다수의 래퍼가 앨범 지향이 아닌 싱글과 EP를 제작해왔으나 아마추어와 소규모 레이블 같은 경우 웹사이트에 음원만 공개하던 것을 고려했을 때 힙합의 큰 별 가리온이 시디(CD) 형태를 갖춘 싱글을 제작하고 그것이 큰 인기를 얻은 사실과, 이를 기점으로 대팔, 트래스패스(Trespass) 등 팬들 사이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이들 이외에 다른 신인 래퍼들의 싱글 출시가 가속화된 점은 가리온의 싱글 두 장이 적잖은 파급을 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싱글 열풍이 피하고 싶을 정도로 탐탁지 않은 성격을 띠며 거세지는 것은 조금 우려되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홈메이드 기술과 싱글이 내포한 숫자상의 적은 부담감이 합쳐지면서 장비나 환경을 원인으로 돌리며 창작자조차 품질이 달리는 결과물의 탄생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거나 음악 제작이 지나치게 즉석요리 화(化)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물론 이런 좋지 않은 상황은 그냥 기우로 끝났으면 한다.

새로운 흐름을 유도하고 이전과 비교해 조금은 생소한 음악 스타일의 변화를 그린 싱글이지만 그대로인 것이 있다. 이들 노랫말의 재기 넘치는 은유와 비유는 아직도 활발하고 두 엠시의 래핑은 기름칠한 바퀴처럼 시원스럽게 구른다. 이런 상쾌함이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기에 형식이 아무리 바뀐다 해도 팬들에게는 그리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 날 이후'의 선연(鮮姸)함, '소문의 거리'같은 신선함이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2집에 대한 암시라면, '불멸을 말하며'에서 방출한 후끈후끈함으로 '가리온, 곧 하드코어'라는 지금까지 이들의 행보만큼 굳건한 등식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다.

-수록곡-
1. 그 날 이후 (작사 : 이재현, 정현일, 채영 / 프로듀서 : 장범용 of Power Flower)
2. 소문의 거리 (이재현, 정현일 / 이재현)
3. 불멸을 말하며 (이재현, 정현일 / Loptimist)
4. 그 날 이후 Instrumental
5. 불멸을 말하며 Instrumental
6. 그 날 이후 Acappella
7. 소문의 거리 Acappella
8. 불멸을 말하며 Acappella
한동윤(bionicsou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