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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온3
가리온(Garion)
2024

by 손민현

2024.12.20

가리온의 숙명이자 난제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 동안 한국 힙합은 발원지 ‘마스터플랜’의 흑백 격자를 초월해 광활한 제국으로 변했고, 순수한 염원을 속삭였던 ‘소문의 거리와 ‘약속의 장소’는 자본이 만든 판으로 대체되었다. 힙합이 잠깐의 대중문화로, 즐거운 엔터테인먼트로 변한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돌아온 검은 갈기의 백마 두 필은 황폐해진 대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이전과 똑같이 달릴 것인가, 혹은 새 시대에 안장을 내어줄 것인가. 생각보다 큰 15년의 중압감이다.


물론 거창한 의미가 < 가리온3 >의 이 무게를 전부 분담할 수는 없다. 전면에 내건 체스판 등 오래된 상징을 납득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후배들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작품성이 요구된다. 기획 총책임자를 자처한 딥플로우의 지휘 아래 ‘가리온 복원’ 태스크 포스 팀이 꾸려졌다. 한 레이블의 수장이었던 그는 킵루츠, 마일드 비츠, 프레디 카소, 더콰이엇, 이안 캐시처럼 다채로운 비트메이커와의 접점을 적극 활용했고, 치밀한 구성미 넘치는 음반을 여럿 다뤄본 경험을 살려 이들에게 명료한 명령을 하달했다.

지시 사항을 잘 이행한 비트가 단연 일등 공신이다. 주문의 상세 내용의 이러하다. 가리온의 기존 스타일을 존중할 것, 그러면서도 이를 답습하지도 않는 빼어난 무기를 갖출 것, 자기 색을 너무 드러내지는 않을 것. 지금의 가리온에게 어울리면서도 갖춰야 할 품격도 조각하는 어려운 숙제였으나 작전은 성공이다. 인트로 ‘해빙’부터 ‘Post mortem’, ‘Pawn shop’ 등에 나타난 정직한 드럼, 중후한 악기 배치에서는 과거의 냄새가 나지만 각자 세련미도 균등하다. 모두가 합의한 이번 테마는 의도된 '이지리스닝 올드스쿨', 올해 힙합 작품 중 가장 듣기 편안한 작품은 노마(老馬)의 품에서 나왔다.

랩에 있어서는 유행을 입히기보다는 근본을 더 깊게 팠다. 하나의 단어에 의미를 최대한 욱여넣는 장점이 있는 메타는 한글 의미를 축약한 단어와 라임의 조합을 선보였고 나찰은 톤을 낮추고 유려하게 올라타며 절제미를 뽐낸다. 한글 사용의 경험치가 두터운 래퍼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 ‘Chess knight’에서는 묵직한 단어가 빛을 발했고 후렴의 화음 구간은 기분 좋게 새 추억을 생산한다. ‘무투’의 빼곡함이나 ‘영순위’같은 타격감과 극적 구성은 약해졌지만, 이 진지하고 솔직한 대담의 집중도는 넉넉하다.

수수한 결의 일관성이 완성도를 보장하나 재미는 또 다른 이야기다. 청취 한 번에 확 꽂히는 뱅어 혹은 최신 기예를 선보이는 ‘랩 차력 쇼’를 의도적으로 배치해 맛을 살리는 방식 대신 가리온은 체스판의 밋밋한 흑백 무늬를 채우기 위해 여러 피처링으로 파훼를 시도했다. 다만 노마지도의 쿤타, ‘Checkmate’의 따마나 ‘Ill’의 타이거JK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 가리온 3 >에 작곡가만큼은 녹아들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모두가 제힘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한국 힙합 역사를 운반하는’ 합작으로서는 여러 의미를 남겼다.

숙명이자 난제를 잘 풀어냈다. 한국 힙합의 두 상징은 아직 빛이 바래지 않았음을 증명했고, 여러 요소가 조화를 이룬 수작 < 가리온3 >는 큰형님의 위치를 대변하기에 충분하다. ‘체스판’이 가지는 의미, 두 중년 래퍼가 내뱉는 문장의 무게, 영리한 비트의 힘, 세대를 아우르는 준수한 조합. 분명 15년 기다림을 해소할 힘과 가치를 갖춘 음반이다. 가리온은 임무를 다했고 결국 듣는 자의 선택만 남았다. 받아들일 것인가, 무관심으로 응대할 것인가, 혹은 존중할 것인가. 레거시를 쌓는 건 아티스트만의 몫은 아니다.

-수록곡-

1. 해빙

2. Monochrome [추천]

3. Chess knight [추천]

4. 불가침 (Feat. Deepflow, 스카이민혁)

5. Kibitz (Feat. 화지)

6. Testify (Feat. Paloalto)

7. 1998 인터루드

8. Blunder [추천]

9. Post mortem (Feat. MINOS) [추천]

10. 노마지도(Feat. KOONTA)

11. 01410

12. Pawn shop (Feat. 개코) [추천]

13. Checkmate (Feat. THAMA)

14. III (Feat. Tiger JK)

손민현(sonminhyu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