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인 듯 정인 듯. 쉽게 정의되지 않는 사랑은 스무살 청년에게 설렘 가득한 < 낭만 >의 시절을 안겨줬지만, 동시에 처음 맛보는 지독한 패배감을 몰고오기도 했다. 빅 나티의 세 번째 EP < 호프리스 로맨틱 >은 행복의 소용돌이가 한 차례 휩쓸고 간 잔해 위에서 시작한다. 전반적인 포맷은 비슷하더라도 ‘희망을 잃은 낭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답게 전작에 만연하던 풋풋함을 지우고 그 자리에 대신 처절한 실연의 아픔을 채워 넣었다.
향상된 보컬 표현이 먼저 두드러진다. 특유의 허스키한 톤은 유지하되 본래 구사하던 싱잉 랩 경력을 연마해 호소력 있는 가창과 담백한 래핑이라는 두 가지 문법으로 환산했다. 두 양상을 오가며 완급을 조절하는 방식이 능숙하게 펼쳐진다. 악뮤의 이수현과 합을 맞춘 오프너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에서 부드러운 듀엣의 태도를 취하다가도, 로킹한 사운드 아래 애절함이 주가 되는 ‘뻔한 발라드’에 접어들자 강력하게 소리를 내지르며 존재감을 휘어잡는 것이 그 예시다.
주제가 다층적인 만큼 곡을 풀어내는 방식 또한 변화를 맞이했다. 신시사이저와 어쿠스틱의 독특한 전환을 통해 듣는 맛을 더한 ‘덫’과 흥겨운 뉴 잭 스윙 리듬 속 오토튠을 적극 이용해 반전을 도모한 ‘빠삐용’의 작법이 흥미롭다. 특히 후자의 경우 과거 당찬 포부를 내비치던 < Bucket List >의 ‘Frank Ocean’과 점차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시작한 < 낭만 >의 ‘Vancouver’를 하나씩 언급하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차근차근 돌아보는데, 이 과정에서 세 장의 연작이 마치 ‘성장 3부작’처럼 다가오도록 만드는 서사의 매듭을 제공하기도 한다.
몰입을 방해하는 지점은 존재한다. ‘정이라고 하자’의 아성을 위시한 ‘친구로 지내다 보면’은 앨범의 장치로 기능하는 ‘수록곡’의 역할과 대중 친화적인 ‘히트곡’ 사이 조율이 모호한 탓에, 작품의 깊은 감정선을 견지하려는 빅 나티와 평범한 조연을 자처한 김민석의 퍼포먼스가 상충하는 문제를 빚는다. ‘몽유’는 개성이 강한 그냥노창과 캐릭터성이 다소 어그러지며 부자연스러운 콜라보를 낳았던 ‘결혼행진곡’의 기억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포스트 말론 ‘Circles’ 풍의 서정적 비트와 후반부 스매싱 펌킨스의 ‘Today’가 떠오르는 기타 리프 역시 기시감을 더하는 요소다.
그럼에도 작사-작곡진을 과감히 압축하고 통일해 곡간 연결성을 대폭 강화하고, 키드밀리와 소금(Sogumm)의 작업물로 정밀함을 입증한 프로듀서 드레스(Dress)와의 상호 교류를 통해 자신이 설 수 있는 공간을 더 크게 확보했다는 점. 그리고 자가발전에 대한 욕심을 당당히 결과물로 나타냈다는 점에서 무수한 잠재력이 포착된다. 무섭게 확장하는 스펙트럼도 이를 방증한다. 불과 몇 년 전, 좋아하는 아티스트에 대한 오마주로 자기색을 정하던 소년이 기억난다. 고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여러 질료가 뒤섞이는 가운데 어느덧 자신만의 팔레트가 만들어지고 있다.
-수록곡-
1.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 (Feat. 이수현) [추천]
2. 뻔한 발라드 [추천]
3. 친구로 지내다 보면 (Feat. 김민석 of 멜로망스)
4. 덫
5. 몽유 (Feat. 그냥노창)
6. 마지막 시
7. 빠삐용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