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가면을 벗자 여린 맨얼굴이 드러났다. 그간 정규작마다 제각기 다른 페르소나를 내세워 내러티브를 풀어냈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는 지난해 ‘Sorry not sorry'의 뮤직비디오에서 모든 분신을 살해하고 맨몸으로 돌아갔다. < Chromakopia >는 일련의 소거 과정을 진솔한 자기 고백과 함께 엮어낸 결과물이다.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음반은 커리어의 분기점이자 다음 장으로 넘어가도록 돕는 교두보 역할을 한다.
서사의 키를 잡은 이는 타일러의 친모 보니타 스미스(Bonita Smith)다. 상당수 곡의 인트로와 아웃트로에 배치된 어머니의 육성은 환자를 이끄는 상담사처럼 그가 속마음을 이야기하게끔 돕는다. 이러한 인도에 따라 성공 후 생겨난 편집증을 잠비아 록 샘플로 표현한 ‘Noid’, 폴리아모리적 성향을 부드러운 팝의 문법에 담은 ‘Darling, I’는 상반된 매력을 연이어 선보이며 장르 경계를 넘나드는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힙합 마니아와 대중 양쪽을 모두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구성이다.
사운드적으로도 본래의 장기를 한결 날카롭게 벼려냈다. 전작의 주무기였던 따뜻한 질감의 신시사이저를 중심으로 하되 감정의 고조에 맞추어 강세를 주거나 ‘Tomorrow’의 후반부에서 아련한 잔향을 남기는 등 심리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운용 방식이 탁월하다. 과거에 종언을 고하는 작별 인사인 만큼 ‘Rah tah tah’로 초창기 시절의 거친 면모를 슬쩍 드러내는 한편 여태까지 음악의 전위성에 가려져 있었던 고향 캘리포니아를 호명하며 뿌리를 찾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한다.
적재적소에 피처링을 배치하는 능력 또한 여전하다. 도치(Doechii)를 비롯한 신예 여성 래퍼들을 적극 기용하고 자신의 보컬이 채우지 못하는 지점을 다니엘 시저와 티조 터치다운이라는 수준급 싱어에게 맡김으로써 전체적인 짜임새를 견고히 했다. 특히 자칫 늘어질 수 있는 스토리텔링 트랙 뒤에 배치한 직선적 뱅어 ‘Sticky’는 날것 그 자체인 글로릴라와 섹시 레드의 벌스가 흐름을 환기한다. 올해 < Blue Lips >부터 절정의 래핑을 보여준 스쿨보이 큐가 참여한 ‘Thought I wad dead’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어 타일러는 여태껏 외면해 왔던 기억으로 초점을 옮긴다. ‘Hey Jane’ 속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을 들었을 당시의 고민과 불안 같은 문제적 주제까지 거리낌 없이 털어놓을 정도로 솔직한 태도다. 그동안 분노 혹은 냉소로만 내비쳤던 떠나간 아버지를 향한 원망조차 ‘Like him’을 통해 수용과 극복의 단계를 거쳐 그의 일부가 된다. 작품이 전달하는 주제 의식은 결국 거짓된 겉치레를 벗고(‘Take your mask off’) 본모습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자는(‘I hope you find your way home’) 것. 이는 곧 듣는 이들뿐만 아니라 항상 페르소나 뒤편에 머물렀던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딱지가 진 상처에 새살이 돋듯 내면의 응어리를 게워 낸 자리엔 따스한 위로가 남았다. < Goblin >의 사이코패스 괴물과 < Call Me If You Get Lost >의 보들레르 경을 지나 비로소 거울을 마주한 타일러는 그 어느 때보다 개운해 보인다. 주류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꾸준한 앨범 발매와 전체 셀프 프로듀싱이라는 작가주의적 고집을 밀고 나갔기에 더욱 각별히 다가오는 성공이다. 이 아직도 젊은 아티스트의 발걸음에 주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수록곡-
1. St. Chroma (Feat. Daniel Caesar)
2. Rah tah tah
3. Noid [추천]
4. Darling, I (Feat. Teezo Touchdown) [추천]
5. Hey Jane [추천]
6. I killed you
7. Judge Judy
8. Sticky (Feat. GloRilla, Sexxy Red & Lil Wayne) [추천]
9. Take your mask off (Feat. Daniel Caesar & LaToiya Williams) [추천]
10. Tomorrow
11. Thought I was dead (Feat. ScHoolboy Q & Santigold)
12. Like him (Feat. Lola Young) [추천]
13. Balloon (Feat. Doechii) [추천]
14. I hope you find your way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