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화 노래는 고래라는 ’동화’적인 소재의 죽음을 다루면서 사회를 비판하고, 나아가서는 어른 세계를 향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재밌는 점은 펑크 밴드 출신이면서도 냉소의 어조보다는 천진함과 동심으로 채웠다는 것인데, 이런 맘가짐은 ‘말 달리자’에서 “닥쳐!”하며 직설로 갈겨대던 방식과는 상극이다.
고래의 죽음을 “안녕 고래야 어딜가니”, “고래가 하늘로 올라가네”라고 표현한 것은 ’역설’이기에 안타까움을 강화시키고, 한편으로는 순수한 어린 아이의 관점 같이 느껴져서 따뜻하다. 비극과 동심이라는 ‘양극’의 정서가 충돌해 만들어낸 감동이어서 마치 적당히 씁쓸한 초콜릿의 맛처럼 쉽게 질리지도 않는다.
록 기타가 훑고 지나간 뒤에 곧바로 나오는 감성 터치의 연주도 참 좋다. 천진함과 활력만이 강조되던 노래 분위기에 잔잔한 아련함을 부여했고, 덕분에 노래의 주제가 더 명확히 부각되고 있다. 짧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에 곡을 쉽게 각인시키는 ‘히트 요인’도 될 것이다.
아마 크라잉 너트는 죽은 고래를 바라보는 순수한 어린 아이를 자신들이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음악을 해온 여정을 알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음악 하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 자신의 삶과 음악으로 그렇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이들의 음악 하는 모습, 담아내는 삶이 모두 흐뭇하다.
크라잉 너트의 실력을 다시금 실감한 곡이다. ‘넘버 3 낭만’, ‘장난꾸러기 하류 인생’ 같은 천진함을 이들처럼 진실하고 능숙하게 표현하는 밴드는 여태껏 없었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보석 같은 감수성을 가졌고, 그것을 고스란히 대중적인 틀 안에서 녹여낼 수 있는 능력도 현재로서는 유일하다. 꼭 옛날의 산울림을 보는 기분도 든다.
윤지훈 어느 날 해안가에 올라와 죽은 고래의 소식을 듣고 만든 노래라고 한다. 아마도 환경오염이나 기상 이변 등의 원인이 있었을 텐데, 크라잉 넛의 만화적 필터를 거치고 나면 비극적 사건도 희극이 되고 만다. 그만큼 유쾌하고 즐겁다. 어떠한 주제라도 부다스럽지 않고 가뿐하게 전달하는 이러한 능력이 크라잉 넛의 가장 큰 재산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