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의 윤상은 1980년대 변진섭이나 이상우의 계보를 이으며 '이별의 그늘', '가려진 시간 사이로'를 부르는 발라드 가수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에 머무르지 않고 몇 년 후 전자음악에 대한 욕망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별 없던 세상'에서 슬쩍 전조를 보여주었던 그는 1996년 신해철과의 합작 노 댄스(No Dance)를 통해 표면화했고, 이후 영역을 확장해 <Renassimiento>(1996), <Insensible>(1998)에서 전자음악은 물론 이른바 월드뮤직이라 하는 새로운 병기를 독점하게 된다.
'새로운 것'에 대한 윤상의 지칠 줄 모르는 탐구는 데뷔 10년 만에 3집 <Cliche>(2000)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꽃을 피웠고, 이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다른 듯 닮은 정규작을 이제야 차례로 발표하며 안정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생소한 음악의 도입이 꽤나 자연스럽게 먹힐 수 있었던 것은 서두르지 않고 점진적으로 음악적 실험(새로운 장르)을 형식적 실험(EP음반이나 프로젝트 등)으로 소개하며 현명하게 제 영역을 구축한 탓이리라.
2002년의 4집 <이사> 이후 1년 만에 만나는 5집 <There Is A Man...>은 그가 10여 년을 모색해 온 '세계로 향하는 길'에 가장 근접해 있다. 타이틀 곡 '어떤 사람 A'부터가 우리와 친하지 않은(?) 변방의 어느 나라를 연상케 한다. 뮤직 비디오도 국제적 감각을 바탕으로 하며(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최근 개봉영화 <그녀에게>를 배경으로 했다), 현지인 보컬리스트 Mariana Suarez를 기용해 같은 곡을 외국어로 재구성한 'Sueno, tu voz...'나 영어 가사로 도배해 놓은 'Good old love song:side A', 'Good old love song:side B'이르면 완벽한 외국곡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신예원이 부르는 '근심가'나 롤러 코스터(Roller Coaster)가 참여한 'Man! What a selfish kid...'의 가사 전달력이 매우 떨어진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주에 매몰된 나약한 음색 탓이 아니라 가사지를 봐야만 고개 끄덕하게 만들어 놓은 의도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특히나 '근심가'의 경우는 '...할지니', '...말지라' 등의 이상한(?) 문어체 가사와 현란한 편곡의 부조화가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다. 새로운 세계의 음악을 '소개'하는 수준이 아니라 몸소 '소화'해서 보여주던 그는 이제 철저한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변치않는 모습도 간직하고 있다. '배반'과 닮아 있는 '예감'이나, 3집의 '내일은 내일', 4집의 'Runner's High'처럼 희망을 노래하는 '작은 세상'과 '너희들 것이니까'는 윤상의 고정 팬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한결같은 노래들이다.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독보적인 신디사이저 편곡도 여전하고('우화'), 1집 '이별의 그늘'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오랜 지우(知友) 심상원은 현악단의 우두머리로 군림하고 있으며, 엘튼 존(Elton John)과 버니 토핀(Bernie Taupin)이 콤비를 이루듯 데뷔 이래 윤상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눠 온 전매특허(?) 작사가 박창학도 동반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올 한 올 정성들여 수놓은 수많은 곡들에, 놓칠 수 없는 유지와 도전해야만 하는 변화가 분명 감지되고 있기는 하지만(오죽하면 인스트루멘탈 버전을 따로 실어 두 장의 씨디로 제작을 했을까. 이는 팬서비스의 일환이기도 하겠지만, 편곡의 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강한 자신감으로 보이기도 한다) 둘 사이에서의 힘겨운 갈등은 끝났고,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이제 완벽하게 남남이 되어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듯 하다. 그가 10여 년에 걸쳐 차분하게 이뤄 낸 오늘의 업적은 '세계 속의 한국인 윤상'이 아닌 '세계 속의 외국인 윤상'이 되는 것이었을까. 일개의 '어떤 (외국) 사람 A'로 기억하기에 '한국적 소화'에 능숙한 윤상의 재능이 조금은 아쉽다.
-수록곡-
[CD1]
1. Introduction To A Man
2. 근심가 (Featuring 신예원)
3. Good Old Love Song : Side A
4. 우화
5. 어떤 사람 A
6. 예감
7. 작은 세상
8. 너희들 것이니까
9. Good Old Love Song : Side B
10. Man! What A Selfish Kid (Featuring Roller Coaster)
11. 길은 계속 된다
12. Sueno,tu voz (Vocal : Mariana Suarez)
13. 근심가 (Fractal La Marcha Mix)
14. 한 남자에 관한 우화
[CD2]
1. 근심가 (Instrumental Version)
2. Good Old Love Song : Side A (Instrumental Version)
3. 우화 (Instrumental Version)
4. 어떤 사람 A (Instrumental Version)
5. 예감 (Instrumental Version)
6. 작은 세상 (Instrumental Version)
7. 너희들 것이니까 (Instrumental Version)
8. Good Old Love Song : Side B (Instrumental Version)
9. Man! What A Selfish Kid (Instrumental Version)
10. 길은 계속 된다 (Instrumental Version)
11. Sueno,tu voz (Instrumental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