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잉넛 인터뷰
크라잉넛
그들은 한결 같았다. 군 제대 후 뭔가 달라졌을(솔직히 성숙했을) 것으로 여겼으나 막상 만나니 여전히 수다, 개구쟁이들이었다. 한 사람에게 물어봐도 여럿이 리볼버처럼 응답하고 재잘거리는 통에 답변을 정리하기도 힘들었다. “우리 이름이 어려운가봐. '크라운 넛'이라는 사람들이 많아. 제일 히트는 언젠가 팬들이 들고 나온 피켓에 써져있던 건데 '크라임 넷'(Crime Net)이었지. 우리가 '범죄 망'인 거지. 흐흐흐.”

한바탕 폭소잔치. 크라잉 넛과 만나보지 않은 사람은 그 오르가즘을 모른다. 동행한 IZM의 엄재덕과 이대화도 “인터뷰를 그렇게 유쾌하게 하는 사람들은 처음”이라며 시종일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다에는 진지함의 성분이 상당했고, 개구쟁이의 특전은 순수임을 슬쩍 알려주었다.
2월4일 오후8시, 막 KBS 2FM <최강희의 볼륨을 높여요>의 게스트출연을 마치고 나온 그들을 만났다. 박윤식(보컬), 한경록(베이스), 이상면(기타), 이상혁(드럼) 그리고 김인수(아코디언, 건반). 동시 입대와 동시 제대로 화제를 모은 그들 다섯은 음반 아닌 공연으로 전역 신고식을 치른다는 소식을 전해 또 한번 눈길을 끌었다. 그것도 전국 순회공연. 2월26일 서울(올림픽 공원 내 올림픽 홀)을 시작으로 부산(3월5일), 전주(3월13일), 대전(3월19일), 수원(3월20일) 대구(4월5일)를 잇는 숨 가쁜 레이스를 펼친다.
그들은 먼저 입대 중에도 많은 관심을 쏟아준 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대화가 먼저 군대에서 과연 음악을 했는지, 또 어떤 음악적 구상을 했는지를 묻자 한경록은 “콘서트나 클럽 공연이 그리웠다.”고 즉답했다. “부대에서 군악대로 활동하긴 했는데, 전부다 의식 행사나 장병 연주회 같은 공적인 행사였어요. 심의에서 잘릴 만한 곡들은 못하는 거죠(웃음). 보통 공연할 때랑은 다르게 직접 악기랑 장비들을 손수 운반해야 했고, 세팅부터 음향까지 모두 우리가 해야만 했어요. 군 생활하는 동안 연주회는 80회 정도, 행사까지 합하면 200-300회는 넘게 했으니까 그동안 쌓았던 경험이 나름대로 노하우가 된 것 같아요. 나가면 어쩌면 더 좋은 공연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한경록의 답변이 끝나자 이상면이 말을 이어받았다.
“이건 정말 재밌고 색다른 경험인데요, 오히려 군대에서 팬이 더 늘어난 것 같아요. 부대 내에서 공연을 다니면서 이름이 더 알려지게 됐거든요. (같은 또래들인데, 크라잉 넛을 모를 리가 있냐고 묻자) 뭐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르던데요? 장교들 만찬에서는 오브리도 했었어요(전형적인 카바레 기타 포즈로 재현). 음악도 들을 수 있었는데, 군악대이다 보니까 재즈하고 클래식을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근데 역시 나올 때 보니까 내가 갈 데는 락큰롤이다 싶더라구요.”
군대에서 음악을 만들지는 않았나요?
“왜요. 만든 곡은 많죠. 하지만 군대생활의 주는 은연중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음악이 자조적이고 우울한 느낌으로 나오더라구요. 우리하고 맞지도 않고 맘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좀 전에 말했듯이 우리는 락큰롤이 체질이더라구요.”
제대 후 앨범을 바로 낼 수 없는 이유였겠네요? 보통은 앨범으로 전역을 신고하는데.
“곡들이 우리 뜻대로, 우리와 맞게 나왔어도 막상 앨범제작은 현실적으로 어렵죠. 공연이 우리의 정체성에 더 가까이 있기도 하고...”
크라잉 넛이 갖는 공연의 의미는?
“돈도 벌고요, 가장 솔직해지고 우리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공간이죠. 평소에는 아닌데, 무대에 올라가면 뭔가 즐거워져요.”
경록씨는 공연할 때보면 대놓고 “우리 같은 삼류 밴드를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치던데, 정말 삼류라고 여기는 겁니까?
“내가 그랬나? 삼류 밴드가 아니라 싸구려 클럽밴드라고 했던 거 같은데요. 괜한 자조나 자학이 아니라 정말로 싸구려 클럽밴드라는 느낌, 그런 느낌이 전 좋아요.”

오래전 얘기가 됐지만 크라잉 넛은 어떻게 결성되고 어떻게 드럭에 들어가게 됐는지를 듣고 싶네요.
이상혁: “결성은 정확히 1993년 고2 때였어요. 그때는 그냥 옥상에서 밤에 기타치고 놀았던 거나 다름이 없었는데, 우연찮게 크라잉 넛이란 이름으로 뭉치게 됐어요. 그러다가 <핫 뮤직> 광고를 통해서 '락 월드'와 '드럭' 이란 곳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우리는 사실 '락 월드'로 가려고 했거든요? 근데 웃기게도 길을 잘못 찾아서 드럭으로 갔던 거예요. 그 날 드럭에서 우리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죠.
하도 난리를 피우니까 드럭 아저씨가(이석문 사장) “너희 뭐하는 놈들이냐?” 하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락 밴드다'라고 했죠. 사실 라인업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냥 그렇게 말했던 거죠 히히히. 마침 그 때가 드럭 밴드들이 다 나갔을 때여서 더 이상 남은 밴드도 없었어요. 그래서 아저씨가 오디션을 보라고 했고, 그렇게 해서 드럭에 들어가게 된 거에요. 사실 그 오디션 때, 연주했다기보다는 점프하고 날라 다닌 게 더 많았죠. 헤헤헤”
입대하면서 발표한 4집 <고물라디오>는 3집보다 응집력이 떨어졌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군에 간다는 압박 때문인지 고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한경록: “아닌데, 그렇게 들으셨어요? 우리는 만들면서 무지 재미있었는데. 굳이 말하자면 그 앨범은 멤버들의 개인적인 취향을 많이 반영했어요. 우리들이 실상 좋아하는 음악적 취향이 약간씩 다르거든요.”
그래요? 흥미롭네요. 다섯 멤버들의 취향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요?
한경록: “어릴 적에 조용필을 좋아했죠. 전 장르를 고집하지는 않아요. 굳이 말한다면 느낌 상 애환이나 고통을 담은 스타일이 궁합이 맞죠. 피에로의 비애랄까, 뭐 그런 거요. 웃음 속에 희망을 전하는 음악 말이죠.” ('서커스 매직 유랑단'이나 '밤이 깊었네' 같은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냐고 묻자 그렇다고 했다)
이상면: “기본은 경록이와 같은데, 전 새로운 소리에 관심이 많아요. 사운드, 연주법, 노래구조 같은 것에 끌리죠. 그래도 몸은 펑크로 갑니다. 정리하자면 특정 장르를 추구하는 것보다는 '좋은 음악' 쪽이죠. 크라잉 넛 하면 펑크지만 전 펑크 라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이미 펑크 라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박윤식씨 취향은 뭔가요? (무대에서 광란의 보컬을 토해내는 게 의아할 정도로 사석에서의 그는 말수도 적고 점잖았다. 그의 답변 순서였지만 굳이 한 번 더 물은 것은 그래서였다. 하지만 답변 내용은 과연 펑크밴드 보컬다웠다. 그것은 기타리스트 이상면도 마찬가지였다.)
박윤식: “전 펑크예요. 솔직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그리고 신나고 그런 것이 펑크 락의 장점이죠. 아직도 그런 음악을 좋아합니다. 공연 때 확 스트레스를 풀어줄 수 있는 음악이요.”
이상혁: “근래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대부분 사운드가 꽉 찬 음악으로 가잖아요. 저의 감동은 펑크 락의 고전에 끌려요. 예를 들자면 라몬스(Ramones) 같은 음악이요. 전 빈 듯하면서 빠른 펑크가 맞아요.”
서로 약간씩은 다르지만 그래도 멤버들 간 대세는 여전히 펑크 같은데요.
이상면: “그래서 저의 경우 5집 새 앨범은 자극제 같은 앨범을 만들고 싶어요. 우리 정서가 조금 슬픈 쪽인 듯한데, 최근에는 너무 그리로 쏠려가잖아요. 거기에 '한방을 먹이는 앨범'을 만들고 싶은 거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김인수씨는 다를 것 같은데. (말을 꺼내자 다른 멤버들은 그를 가리켜 동료라기보다는 음악스승이라고 했다. 음악을 많이 듣고, 그것들을 청취용량이 적은 자신들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이었다)
김인수: “기타를 연주하고 싶구요, 10년 정도 공부해서 블루스 밴드를 하고 싶어요. 에릭 클랩튼이나 로이 부캐넌(Roy Buchanan)과 같은 음악이 꿈이죠.”
늘 같이 해온 것은 알지만 정식 멤버로 김인수씨가 들어오게 된 계기는? 크라잉 넛의 음악에 전기(轉機)가 됐죠. 아코디언은 언제 만지게 된 겁니까.
한경록: “그래요. 제가 추구하는 피에로의 비애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악기가 인수형의 아코디언이죠. 1999년 2집 '서커스 매직 유랑단'이 시작이었는데 인수형은 그때 멜로디언을 연주했어요. 그게 부셔지자 어느 날 아코디언으로 들고 와 연습하더라구요. 그날로 인수형의 아코디언은 크라잉 넛의 절대 악기로 부상했고, 공식적으로 멤버도 된 거죠.”
'밤이 깊었네'는 크라잉 넛 음악행로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곡입니다. 아코디언 음색이 강조되고 펑크 일변도가 아닌 다양해진 색깔의 음악임을 웅변해주었죠. 조금 과장한다면 폴리스(Police)의 스팅이 'Every breath you take'를 만들었던 것처럼, 펑크가 이 정도로 성숙된 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웅변했다는 거죠.
이상면: “('Every breath you take') 진짜 죽이는 곡이지. 이건 정말 과찬이다.”
한경록: “제가 쓴 곡인데요. 하숙집에서 그 분위기를 찾아냈죠. 대학 때 하숙집이 외딴 곳에 있었거든요. 혼자 집에서 할일이 없어서 소주 먹으며 베이스를 쳤는데 라인이 만들어졌습니다. 분위기를 완성하기 위해서 아코디언이 필요하더라구요.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인수형의 아코디언은 의도적인 것보다는 이렇게 (음악적)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등장한 거죠.”
크라잉 넛의 시그니처 송인 '말달리자'는 어떻게 평하나요? 점잖은 넥타이부대도 열광하는 곡인데...
이상혁: “윤식이가 쓴 곡인데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줬죠. 그동안 많이 전진했지만 크라잉 넛의 정체성은 이 곡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가장 맘에 드는 곡이죠. '싸나이'와 더불어 서요.”
다른 멤버들이 맘에 드는 곡은 뭔가요?
한경록: “'서커스 매직 유랑단'이에요. 제 장례식 때도 인수형이 아코디언을 쳐줬으면 좋겠습니다.”(그러자 옆에서 “그때까지 인수형이 살아있을까?” 하며 농이 따발총처럼 튀긴다)
이상면: “1집 곡이 좋아요. 그때는 몰랐는데 다시 들어보니 아방가르드적인 면도 있고 단단히 미쳐있죠. 멋모를 때, 형식이 잡혀있지 않을 때의 음악이라서 더 맘에 들어요.”(쌍둥이 동생 이상혁이 말한 '말달리자'와 '싸나이'도 모두 1998년 1집 수록곡이다)
박윤식: “인수형이 곡을 쓴 '지독한 노래'요. 비트도 빠르고 정신없는 분위기가 좋아요. 후반부 욕하는 대목에선 카타르시스를 느끼죠.”
김인수: “글쎄요. 전 다 좋아요.”
음악 하는 사람은 늘 학창시절에 공부하라는 부모님과 충돌하기 마련인데, 크라잉 넛의 음악은 더욱이 기성세대가 납득하기 어려운 펑크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반대가 더 많았을 줄로 아는데 어땠어요?
박윤식: “부모님이 대학만 가면 맘대로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공부도 하고 음악도 한다' 주의였습니다. 펑크에 관해선 부모님께 음악적으로 설득했죠. 그렇게 세찬 반대는 아니었지만 다들 그렇듯 늘 부딪쳤습니다. 음악 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음악 듣는 사람들도 그렇잖아요.”
이상혁: “중학교 땐가 아버님이 반에서 1등 하면 리바이스 바지 사준다고 약속하셨어요. 죽어라 공부해서 1등 했는데 안사주시는 거예요. 너무 열 받아서 온몸에 맨소래담 바르고 슬레이어(Slayer) 음악 틀고 난리블루스를 벌였죠.”
한두 번 듣는 얘기가 아닐 테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갑시다. 펑크는 솔직히 하층계급 젊은이들의 음악이잖아요. 그런데 크라잉 넛 멤버들은 집안형편도 괜찮고 다 대학생들이죠. 사실 지금도 그런 점을 비판하는, 아니 비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상면: “대학생활을 하면서 전 스스로 왕따를 당했습니다. 대학 4년을 다니면서 대학생활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경험했죠. 그러면서 '대학 속에서 펑크를 할 수 있다'는 정체성을 확인했어요. 솔직히 우리 대학생활이 얼마나 가식적입니까, 스탠더드만을 요구하고 또 보면 공부가 아니라 목표는 취직이에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스스로 제적을 당했죠.”(크라잉 넛 가운데 대졸은 한경록뿐이고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재학 중 자퇴했다)
한경록: “그와 관련해서 솔직히 고민이 많았어요. '부르주아가 무슨 펑크냐?”는 힐난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펑크를) 하고 싶었어요. 방황과 갈등의 나날이었습니다. 우린 적(敵)이 많았습니다. 온통 적이었어요.”
'드럭'에서 놀던 시절 이래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펑크의 대표자로 우뚝 섰습니다. 동시대에 제법 펑크그룹들이 많았는데, 크라잉 넛만이 위대한 생존자가 된 거죠. 그 이유가 뭘까요? 어떤 점이 크라잉 넛을 서바이벌 게임의 승리자로 만든 걸까요?
박윤식: “멤버십이죠. 대부분의 그룹은 멤버들의 변화가 많은데 우린 10년 동안 교체 없이 똑 같은 얼굴로 해왔잖아요. 이게 통한 것 아닐까요. 전 이 대목이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그간 경제적으로는 괜찮았나요? 웬만해서는 밴드 살림꾸리기가 어려운데. 참 그리고 수입은 정확히 다섯 사람이 똑같이 나눠 가지나요?
한경록: “그럼요. 당연하죠. 입대 전에도 수입이 어느 정도는 됐고, 군 생활 중에도 이석문 사장으로부터 계속 월급을 받았어요. 경제적인 면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크라잉 넛 멤버들을 음악으로 인도한 결정적인 음악은?
이상혁: “전 모틀리 크루의 'Dr, Feelgood'입니다. 저로 하여금 락으로 방향타를 돌리게 한 곡이었죠.”
한경록: “전 앨범이 아니라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였죠. 호암아트홀에서 개봉할 때 봤어요. 그가 곡도 썼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더 존경하게 됐습니다.”
이상면: “중학교 때 <핫 뮤직> 잡지를 보고 '음악을 듣지만 말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3학년 때 너바나(Nirvana)가 나왔어요. 쇼크였고 그러면서 거슬러 올라가 펑크의 전설들인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이 정도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죠.”
박윤식: “전 친구 따라 강남 간 케이스인데 친구들 중에 메탈리카(Metallica)를 좋아한 애들이 많았어요. 저에게 기타를 잡게 한 음악이었죠. 거대한 울림이었습니다.”
김인수: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이었습니다. 제가 지향하는 음악의 모든 것이 거기에 담겨 있었어요.”
밤11시가 훨씬 넘어 인터뷰를 마치고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술 한 잔을 청했더니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좋아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매니저는 바로 장소 섭외에 들어갔다. 홍대 근처의 저렴한 소맥집에서도 그들의 즐거운 소란, 왁자지껄은 똑같은 볼륨으로 계속되었다. 음악 얘기로 꽃을 피운 게 아니라 불을 태웠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가듯 하염없이 술이 들어갔다. 기록해야 할 소중한 토로들이 쏟아졌지만 지금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만나야 할 것 같다. 그날 봐선 그들이 거절할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