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침서(指針書)’의 사전적 의미는 “규칙화된 수속이나 순서를 기술한 자료집”이다. 앨범은 듣는 이와 함께 이별의 수순을 밟으며 사전적 정의에 충실하다. 한마디 남짓한 내래이션(narration)으로 이루어진 ‘ChapterⅠ 정리(情理)’, ‘ChapterⅡ 일탈(逸脫)’, ‘ChapterⅢ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ChapterⅣ 하루를 사는 방법’은 그의 재치―앨범이 책의 포맷을 답습하는―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키며, 뚜렷한 기승전결로 구성의 탄탄함을 더한다.
“그냥 단비에 그치면 언젠가 다시 메마르잖아/또 외로움 익숙해지려면 다시 그리움부터 시작해야해”
'단비’는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라는 한 시인의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 두 이야기 속 ‘비’는 메마른 자신을 다시금 태어나게 하는 생명적 존재(‘단비’)와 풍파적인 존재(이규리, < 많은 물 >)로 상반된 의미를 가지지만, 사랑하기에 피어나는 불안함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보코더의 사용이 인상적인 ‘언제라도’, 담백한 피아노 연주와 옆에서 이야기하듯 건네는 가사가 인상적인 ‘헤어진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가 주는 위로는 듣는 이의 마음을 뭉근하게 만든다.
화룡점정은 타이틀곡인 ‘Annie(애니)’. ‘애니’ 단 한 곡만으로도 이 앨범은 완벽하다. 촘촘히 쌓아지는 남성 3중창 코러스는 성당의 오라토리오를 닮았다. 이를 통해 화자의 고백은 비장한 ‘고해성사’로 변모한다. 토해내듯, 한숨 쉬듯 뱉는 “애니”에서 느껴지는 애틋함, 듣는 이의 귀를 한 번에 사로잡는 흡인력 있는 후렴의 멜로디 라인, 간주를 메우는 색소폰의 절제 없는 솔로까지! 모든 것들이 철저히 계산된 다이나믹을 통해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 고요한 폭풍을 효과적으로 그린다.
그의 가사는 ‘생활 밀착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을 정도로 일상 속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까/날 잊긴 힘들거야’라고 지난날을 고백하는 ‘잘 했어요’,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을 정리하며 ‘오해마요/이 눈물은 자욱해진 연기 때문이에요’라고 덧붙이는 ‘불놀이’, ‘그대에게 유일한 흠이 내가 될까봐’ 고백하지 못하는 ‘Miss. perfect’까지. 찌질한’ 가사는 직접 뱉을 수 없었던, 그러나 꼭 하고 싶었던 ‘우리의’ 말(言)이다.
-수록곡-
1. ChapterⅠ 정리(情理)
2. 희열이가 준 선물 [추천]
3. 모처럼 [추천]
4. Why
5. 잘 했어요 [추천]
6. ChapterⅡ 일탈
7. 오! 이밤을
8. 여행을 떠나요
9. 불놀이 [추천]
10. Hey! Loser!
11. ChapterⅢ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12. 단비 [추천]
13. Miss. perfect
14. Annie(애니) [추천]
15. 언제라도
16. ChapterⅣ 하루를 사는 방법
17. 버려진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