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킨 파크의 왕관은 무겁고 녹슬었다. 새천년의 문을 박차고 나타난 혁명의 데뷔작 < Hybrid Theory >와 2집 < Meteora >의 강렬함은 시간의 흐름에 시나브로 희미해진 지 오래였고, 2017년작 < One More Light >에 내리쬐길 바랐던 한 줄기 빛은 애석하게 사라졌다. 긴 슬럼프가 이어지던 중, 보컬 체스터 베닝턴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린킨 파크가 더 이상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이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마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이크 시노다를 비롯해 남은 멤버들은 정지가 아닌 극복과 지속을 택했다. 드러머 롭 버든의 자리는 콜린 브리튼이 이어받았고, 체스터 베닝턴의 왕좌에는 여성 보컬 에밀리 암스트롱이 앉게 되었다. 팬들도 극명한 호불호를 내비친 파격적이고도 위험한 변혁이지만, 이 용감한 리런치는 밴드 내에 새로운 열정과 활기를 불어넣었다. 린킨 파크의 통산 8번째 앨범이자 새로운 린킨 파크의 첫 번째 작품 < From Zero >는 앨범 제목처럼 처음부터 다시 쓰는 그들만의 서사시다.
굳이 린킨 파크라는 브랜드를 계속 써야만 했냐는 의문에는 전체적인 사운드로 시원하게 답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사냥개처럼 이를 갈면서 맹렬하게 울리는 기타와 과격한 드럼 비트, 선명한 멜로디 라인, 조 한의 스크래치와 마이크 시노다의 래핑, 그리고 약간의 감성적인 모습까지, 기존 린킨 파크의 색채를 그대로 유지한다. 에밀리 암스트롱은 체스터 베닝턴을 지나치게 모방하려 하지 않는다. 스크리밍 창법, 마이크 시노다와 호흡을 주고받는 구성 자체는 이전과 동일하나, 자신만의 색깔을 밀고 나가면서도 겉돌지 않기에 익숙함과 새로움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매력 포인트로서 성공적으로 자리한다.
'Two faced'는 그러한 강점이 가장 돋보이는 킬링 트랙 중 하나다. 1집의 히트곡 'One step closer'가 연상되는 초기 린킨 파크의 폭발적인 뉴 메탈 사운드에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쫀쫀한 완급 조절, 각자 벌스와 후렴을 탄탄하게 진행하는 두 보컬의 안정감, 중독성 강한 훅 멜로디와 강렬한 샤우팅까지, 린킨 파크의 음악을 좋아하는 모든 이들의 니즈를 만족시킬 만한 곡이다. 'Heavy is the crown' 역시 초기 린킨 파크의 감성이 그대로 살아있으면서도, 왕관의 무게라는 서사와 린킨 파크의 현재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입체적인 매력을 확보한다.
그러나 기존의 강점뿐만 아니라 고질적인 단점 또한 그대로 계승한다. 특히 초기 뉴메탈 사운드와 거리가 있는 곡들은 평범하거나 과하다. 그나마 'The emptiness machine'은 다소 평이하나 세션 구성이 탄탄하고 2000년대 초반의 향수를 자극하는 기타 리프가 단점을 상쇄한다. 그러나 다른 트랙은 해당 곡만큼 매력을 드러내지 못한 채 안전함 속 지루함을 노출한다. 특히 'Over each other'은 지나치게 산만한 변주로 좋지 않은 감상을 남긴다. 'Overflow'는 이도 저도 아닌 부실한 얼터너티브 메탈로, 앨범 내 가장 지루한 포인트이며, 반대로 'Casualty'는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 보컬 또한 사운드와 겉돈다.
< From Zero >는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지난 여정을 회상하고 극복의 의지를 표명하는 린킨 파크의 커리어 총망라이자 새로운 시작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동 포인트가 있다고 해서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음악적인 문제들이 마법처럼 사라질 수는 없다. 비극의 늪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어젖히고 왕조의 재건을 꿈꾸는 그들에게 남은 것은 확고한 방향을 위한 선택과 집중, 그리고 녹슨 왕관을 쓴 에밀리 암스트롱에게 익숙해질 적응 시간이다.
-수록곡-
1. From zero (intro)
2. The emptiness machine [추천]
3. Cut the bridge
4. Heavy is the crown [추천]
5. Over each other
6. Casualty
7. Overflow
8. Two faced [추천]
9. Stained
10. IGYEIH
11. Good things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