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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plugged
거미
2006

by 이민희

2006.05.01

'언플러그드'는 말 그대로 플러그를 꼽지 않은 음악을 말한다. 기계적이고 합리적인 전자음에서 벗어난다는 형식은 곧 아날로그적인 음악, 그래서 자연스러운 음악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의미를 내포한다. 실제로 영미권에서 언플러그드 앨범을 발표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로드 스튜어트, 에릭 클랩튼, 머라이어 케리, 너바나, 로린 힐, 알리시아 키스 등등 '왜 언플러그드를?' 하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믿음직한 인사들이다. 그런 뮤지션들에게 언플러그드는 이미 갖추고 있었던 기술의 제반을 축소해 거꾸로 더 뛰어난 음악성을 확보한 성공의 모험담을 선사했다.

국내 가수 거미도 언플러그드 앨범을 발표했다. 작년에 나온 알리시아 키스의 언플러그드 앨범을 듣고 '눈이 번쩍 뜨이는'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꼭 하고 싶은 작업이었으며, 언플러그드 앨범에 대한 가수의 욕심을 당연하다고 말한다. 앨범을 발표한 후 거미가 했던 말들은 비교적 언플러그드 앨범이 많이 나오는 서구의 경우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음악을 새로운 형식에 담아 보겠다는 모험이자, 가창력을 검증받는 남다른 방식의 실험이며, 공연 중심의 활동을 하겠다는 확신에 찬 선언이다.

개인적인 거미의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대표곡 '기억상실'을 들으면서 신인치고 보기 드물게 풍부한 성량을 가졌다는 것, 노래가 원하는 감수성을 풍부하게 갖고 있다는 것은 파악이 되었지만 어딘가 부담스러운 느낌이었다. 가창력을 과시하고 싶다는 과잉욕심부터 느껴졌다. 세 장의 정규 앨범에 이어 언플러그드 앨범을 발표한 거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는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재능과 포부를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방법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미 스스로도 이번 작업만큼은 즐기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임할 수 있었다고 한다.

1집 수록곡 '그대 돌아오면'을 타이틀 곡으로 선정한 언플러그드 앨범은 기존의 발표곡들을 모았다. 역시 1집의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나는' '부탁', 2집의 '기억상실' '하고 싶었어' 'Dance dance' 및 3집의 '아니' '어른아이' 등을 배치해 놓았다. 언플러그드 앨범을 발표할 정도의 욕심이라면 롤 모델과 취향을 반영해서 선배 가수의 곡을 리메이크할 것도 같은데, 언플러그드 앨범이 드문 국내 환경과 정서를 반영해 재해석에 중점을 둔 노선을 취했다. 익숙한 곡으로 낯선 형식의 이질감을 해소하고, 아쉬움이 남는 비히트곡들을 다시 들어 볼 것을 권한다.

영미에서 그동안 선보여왔던 기존의 언플러그드 앨범은 공연 실황을 앨범으로 옮긴 경우가 많았다. 거미는 반대의 방법을 취한다. 이른바 '스튜디오형 언플러그드 앨범'이다. 먼저 언플러그드로 라이브의 상황을 연출하고 거꾸로 공연을 약속하려는 것 같다. 라이브를 염두에 둔 음악 전곡을 거미는 공동으로 편곡했다. 거미와 함께 미국 재즈 밴드 포플레이(Fourplay)의 베이시스트 나단 이스트가 편곡과 세션을 총괄했다고 한다. 참여한 연주자들 또한 외국 인사들이다. 생각보다 라이브의 질감이 살아나지 않는데, 연주보다는 보컬의 자연스러움을 살리려고 노력한 결과 같다.

덕분에 보컬의 반경을 넉넉하게 확보한 거미는 고음을 과시하는 대신 유유한 진행을 따른다. 한편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담담하게 노래하는 목소리는, 이은미의 발성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독창적인 가창을 찾기 위한 절차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성과를 냈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앨범이다.

그리고 이런 거미의 참신한 언플러그드 작업 뒤편에는 영미권 가수들의 방법론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빠르게 이식하는, 기획사 YG의 보스 양현석이 서 있다. 신선하고 고무적인 시도의 대부분이 보통 제도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조금 씁쓸한 일이지만, 급은 낮고 잘 팔리기만 하는 암담한 싱글만 복사하는 데에 권력의 기반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정규 앨범이 아닌 번외의 작업에 과감하게 투자했다는 것 역시 작은 부분부터 웰 메이드를 지향하는 바람직한 단계성을 입증한다. 채산성 높은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나오는 음악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수록곡-
1. 그대 돌아오면 (작사 : 박경진 / 작곡 : 이현정)
2.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박경진 / 거미)
3. 혼자만 하는 사랑 (최갑원 / 이현정)
4. 손 틈새로.. (최갑원 / 김민)
5. 어른아이 (최갑원 / 김도훈)
6. 날 그만 잊어요 (박경진 / 이현정)
7. 아니 (최갑원 / 서빛나래)
8. 하고 싶었어 (최갑원 / 전상환)
9. 기억상실 (최갑원 / 김도훈)
10. Dance Dance (최갑원 / 송백경)
11. 나는.. (박경진 류재현 / 류재현)
12. 부탁 (박경진 / 홍성수)

프로듀스 : 거미, 나단 이스트(Nathan East)
이민희(shamc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