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조금만 노래를 잘해도 금세 인정받았지만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무조건 가창력은 필수다. 웬만큼 잘해 가지고는 전문가 뺨치는 대중들의 예민한 귀를 파고들기 힘들다. 여기, 다소 징그럽게 느껴지는 거미란 이름을 달고 나온 이 신인 여가수는 '보통'이 아니라 '매우' 잘 한다.
작년 대박을 터뜨렸던 휘성의 노래 스승이란 직함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가창에 일가견이 있다. 최근 갑자기 러시를 이루고 있는 실력파 여성 보컬리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기분 좋은 선전이 기대된다.
거미의 음악 자체는 R&B를 가미시킨 팝 발라드가 중심이지만 결코 얇게 들리지 않는다. 청아하고 고운 가창이 아니라 묵직한 디바형 보컬이다. 무작정 흐느끼지 않고 시종일관 파워를 유지한다. 따라서 흑인 감성과 한국 정서의 동시 겨냥이 가능해진다. 이른바 요즘의 대세인 '한국적 R&B'다.
친숙한 피아노 발라드와 리드미컬한 힙합 넘버가 하나의 음반에, 때론 하나의 노래에 공존하고 있다. 사실 거미줄을 쭉 따라가 보면 그녀의 서식처가 양군기획 쪽임을 알 수 있다. 음악적인 키워드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될 것이다.
'하고 싶은 말', '그대 돌아오면..',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와 같은 초반부 발라드 곡과 흑인 재즈 풍의 'Wanna be..', 실력파 4인조 빅 마마가 코러스로 참여한 '오늘도 온종일..' 등 들음직한 노래들이 즐비하다. 그녀의 진한 목소리는 후반부의 본격적인 흑인 리듬 속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며 끝까지 일정 수준의 역량을 유지한다. 여러 곡에서 코러스를 담당하며 우정을 과시한 휘성도 음반의 맛을 더해주는 조미료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음반에는 친절한 안내 표지판도 존재한다. 흘러간 히트곡들이 부제가 되어 노래를 듣기 전에 미리 내용을 짐작케 한다. 원타임의 송백경이 만든 휘성과의 듀엣곡 'Do It'의 부제는 그 유명한 김현철·이소라의 '그대 안의 블루'이다. 떠난 남자를 차갑게 거부하는 마지막 곡 '가버려'는 싸이의 '끝'으로 설명한다. 재미있는 장치다.
22살의 신참 여가수라면 예쁘게 꾸민 사진을 앨범 전면에 내세울 법도 한데 의외로 거미 같은 끔찍스런 절지동물을 표방하고 나왔다. 실력이 뒷받침되다보니 이상한 돌출행동으로 비치진 않는다. 오히려 끈끈한 거미줄로 대중들을 포획하고자하는 그녀의 기특한 다짐이라고 해석해 주고 싶다. 쉽게 끊기지 않는 진한 음악과 목소리로 조금씩 나아가는 거미의 모습을 지켜봐 주자. 괜히 손바닥으로 때려잡으려고만 하지 말고.
-수록곡-
1. 하고 싶은 말 (부제 : 떠나려는 그대를 - 일기예보 1995)
2. 그대 돌아오면.. (부제 : 그대 내게 다시 - 변진섭 1992)
3.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부제 : 미워서 미워질 때 - 변진섭 1990)
4. Wanna be.. (부제 : 그대와 영원히 - 이문세 1985)
5. 나는.. (부제 : 거짓말 - god 2000)
6. Do it.. (부제 : 그대 안의 블루 - 김현철, 이소라 1992)
7. 부탁 (부제 : 어떤 그리움 - 이은미 1994)
8. Phone call (부제 : 배반의 장미 - 엄정화 1997)
9. 거기 그대로.. (부제 : 용서 - 이희진 〈서울의 달 ost〉 1994)
10. 언제라도.. (부제 :다 줄 거야 - 조규만 2000)
11. 오늘도 온종일.. (부제 : 오늘도 난 - 이승철 1996)
12. 가버려 (부제 : 끝 - Psy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