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에게 이번 EP는 특히나 중요하다. 내부에서는 전작 < Girls >의 부진과 소모적인 갓더비트(GOT the beat) 활동에 이수만 프로듀서가 강제했다는 ‘나무 심기’ 가사 논란까지 있었고, 외적으로도 SM 엔터테인먼트의 인수합병 등 불리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악당 블랙맘바와 싸우던 가상 세계 광야를 벗어나 현실 세계로 진입한 것은 접근장벽을 낮추고 대중적 입지를 되찾으려는 의지로 읽을 수 있다.
나이비스(nævis)의 피쳐링을 지우면 에스파의 곡이 아니라 해도 믿을 만한 ‘Welcome to my world (Feat. 나이비스)’와 달리 타이틀곡 ‘Spicy’는 절충적이다. 일상적 풍경 속 온갖 이상 현상이 벌어지는 뮤직비디오처럼 복잡한 세계관 가사를 내려놓았으나 자극적인 질감의 외피는 유지하고 있다. 사이버 전사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타협이다. 그룹의 색채와 대중성을 모두 잡으려고 한 탓에 결과적으로 ‘Spicy’는 독창성도 옅고 클리셰적인 맛도 부족하다. 두 번 등장하는 포스트 코러스(‘Don’t stop 겁내지 마’)를 제외하면 답답한 단조 멜로디는 마땅히 해소되지 못하고, 귀 아픈 전자음이나 곡을 가득 채운 랩도 유의미한 구심점으로 기능하는 대신 f(x)의 ‘Hot summer’나 있지(ITZY) 등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쟁점은 특정 사운드가 아니라 태도에 있다. 진한 PC 뮤직 스타일 리듬의 ‘Salty & sweet’이 안일한 훅과 함께 침몰하는 반면, 선율과 음색이라는 기본 재료 위주로 꾸린 ‘Thirsty’와 ‘I’m unhappy’가 오히려 와닿는 대조적 상황이 이를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레드벨벳의 잔상이 강하지만 감각적인 후렴과 소셜 미디어에 반감을 표하는 가사 등 곡 자체의 매력은 출중하다. 급진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면 아예 보편성의 측면으로 과감히 파고드는 것도 하나의 대책이 될 수 있다.
이미 하반기 또 다른 앨범을 예고했듯이 신보는 그룹에게 드리워진 부정적 이슈를 일차적으로 씻어내려는 전략적인 수다. 당연히 음악적으로도 속 시원한 해답보다는 다음 단계 및 장기적 행보를 둘러싼 고뇌의 과정에 가깝다. 복귀와 함께 이미지 확장이라는 자체 목표 완수에는 성공했으니 이번의 도움닫기를 이어질 도약으로 연결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 My World >는 영토 점령의 선포보다는 경계를 넘어 관문을 여는 신호다.
-수록곡-
1. Welcome to my world (Feat. nævis) [추천]
2. Spicy
3. Salty & sweet
4. Thirsty [추천]
5. I’m unhappy [추천]
6. ‘Til we meet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