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둘러싼 공방 끝에 SMCU(SM Culture Universe)는 새로운 시즌을 맞이했고, 에스파도 이 개혁의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돌이켜 보면 < My World >는 동향을 살피기 위한 시장 조사에 가까웠다. 상징과도 같은 세계관을 반절 걷어내고 디스코그래피의 핵심 작법을 가볍게 취합해 나열하는 작업.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변화의 물꼬를 조금씩 넓혀가며 조심스레 영점을 조절하던 시기였다.
하나 < Drama >의 기세는 뭔가 다르다. ‘Savage’에서 발포되어 ‘Salty & sweet’에서 가공을 거친 금속성 신시사이저 총알이 다시 한번 ‘Drama’라는 표적지에 명중한 것까지는 동일하다. 그러나 불필요한 움직임을 없애고 최소한의 악기만을 가진 채 나아가는 과감한 전개에서 방향성을 잡았다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가사의 태도도 확고하다. 더 이상 서사 전개와 캐릭터 행방을 설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듯, 보편적인 노랫말과 반복되는 후크 사운드가 당당히 그 빈 자리를 대신한다.
비공식적인 광야 탈출 선언이다. 펑키(funky)한 기타와 유니즌 코러스가 대두되는 ‘Don’t blink’와 들뜬 마음을 열기구에 빗댄 노랫말 사이로 각종 효과음이 뒤뚱거리는 ‘Hot air balloon’은 레드벨벳의 총아를 자처한다. 과거 에프엑스가 애용하던 EDM 공식을 가져온 ‘Yolo’와 어쿠스틱 감성 아래 소녀시대 시절의 발라드를 복원한 ‘You’는 강한 회귀 의지다.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국면 전환, 에스파라는 하드웨어에 선배들의 정통 소프트웨어를 이식하는 과정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룹의 진보성과 정체성이 미약해지는 걸 감안하더라도 입지를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해 발표한 경영 방침으로 보인다. 앨범 구성도 고민의 기로에 서있던 전작과 달리 속전속결로 진행된 모양새가 감지되는데, 전문적인 SMP 스타일의 수록곡으로 내용물을 채운 뒤, 초기와 후기 상태가 비장하게 중첩된 ‘Drama’와 현 시류의 디테일이 부드럽게 녹아든 트랙 ‘Better things’로 포장지를 덮었다.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 봤을 에스파가 평범함을 택한 평행우주가 실현된 셈이다.
물론 < Savage >를 지지하던 코어층에게는 아쉬운 선택일 테지만, 큰 변동에도 멤버 개개의 음색과 조합의 백미가 고스란히 들린다는 점은 분명 긍정 요소다. 전략적 착수 < My World >에 이어 < Drama >까지 빠르게 연결한 공격 전술에도 플레이어가 이를 충분히 소화할 역량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 독자적 무기나 확실한 한 방이 없더라도, 오히려 지금은 현재를 도모할 방편을 찾았다는 것이 더 중요한 시점일지도 모른다.
외적인 논란과 위기를 겪은 검객은 어느덧 블랙 맘바라는 거대한 예명을 잠시 내려놓고 베아트릭스 키도의 진명(眞名)으로 당당히 나선다. 로켓 펀처나 제노글로시 같은 특별한 기술이나 초능력은 없을지언정, 오랜 세월 연마해온 칼은 언제든 능숙하게 다룰 준비가 되어 있다. 어느덧 이들의 눈동자에 총기가 서린다. 지금의 SM은 당분간 우리에게 맡겨도 좋다는 묵직한 대사와 함께.
-수록곡-
1. Drama [추천]
2. Trick or trick
3. Don’t blink
4. Hot air balloon [추천]
5. Yolo
6. You
7. Better things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