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인터뷰
김범수
우리나라에서 '육각형 보컬리스트'는 김범수 단 한 명을 지칭하는 표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현존하는 정석. 여전히 수많은 가수 지망생의 귀감이 되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그런 그가 지난 2월 22일, 불현듯 정규 9집 < 여행 >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모습의 가수 김범수가 아닌 지금껏 보지 못했던 인간 김범수를 내걸고.
그는 자신의 25년 음악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찬란한 성공의 순간도, 뼈 아픈 시련도 모두 지금 이 궤적을 완성하기 위한 필연적인 테두리였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모든 무대와 모든 순간마다 김범수라는 브랜드를 증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갈고 닦던 시절도 있었다. 잠시 그루터기에 앉아 차분히 주위를 둘러본다. 기분 좋은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도 좋을 것 같은 날씨, 홍대 인근의 사무실에서 김범수를 만났다. 벌써 이즘과의 세 번째 인터뷰일 만큼 베테랑 경력을 지닌 그이지만, 매번 “항상 많이 배워간다”는 말과 함께 순수한 열의를 내비치는 모습에서 초심을 느낄 수 있었다.
정규 9집 < 여행 >은 어떤 상황에서 작업한 앨범인가.
< 여행 >은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고 난 후 작업한 앨범이다. 사람은 좋은 일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지만, 위기나 시련을 겪은 후 얻거나 비우는 것이 있지 않나. 근래 나 자신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것을 덜어내고 나니 오히려 평온한 마음이 든다.
혹시 사랑의 감정일까.
아, 공교롭게도 철저히 혼자일 때 작업한 앨범이다. 물론 그 점도 여러모로 많은 도움이 됐다. 회사 사람들도 앞으로 앨범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연애를 하면 안 되겠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할 정도니. (웃음)
이번 앨범은 가창력보다는 유독 가사가 두드러진다.
작곡가의 곡을 받아 소화하는 보컬리스트는 자신의 이야기를 곡에 직접 담아 전달하기가 구조상 어렵다. 대신 보컬 테크닉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좋은 곡을 더 잘 가공해 전달할 수 있으니까.
어느 날 문득 플레이리스트를 봤는데, 가사가 좋은 곡만 남겨져 있었다. 그전에는 편곡과 테크닉이 화려하고 음악적 기법이 다양한 곡 위주였다. 하지만 큰 전환점을 맞으면서 정서가 바뀌었다. 지금은 기타 한 대와 시 한 편을 노래하는 곡에 관심이 더 쏠린다. 가사가 좋은 앨범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내려면 많은 걸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맞다. 사람들은 김범수하면 가장 먼저 화려하고 어려운 난이도의 곡을 소화하는 모습을 떠올리지 않나. 이런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
가수 생활 시작부터 피지컬이 주가 되는 노래를 쭉 불러 왔기 때문이 아닐까. 그 때는 보여줄 수 있을 때 마음껏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실력이 영원할 줄 알았다기보다는,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하고 폭포처럼 쏟아내기에 바빴다고나 할까.
그러던 와중 내 목에 관한 신념이 완전히 깨진 순간이 있었다. 급성 후두염이 찾아왔다. 관리 소홀의 문제도 아니었고, 그냥 갑자기 그렇게 됐다. 컨디션이 안 좋아도 늘 하던 것처럼 이겨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게다가 준비를 가장 철저하게 했던 20주년 기념 공연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 딱 한 곡 부르고 나서 그제야 공연을 이어가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관객분들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한 뒤 공연을 취소했다.
혼란스러웠다. 운동으로 치면 웨이트를 계속 쌓아가려 하다 용량 초과가 와서 짓눌려 한 번에 무너진 셈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다시 쌓아서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리 치료도 받았고 그런 슬럼프를 계속 겪던 와중 관점을 바꿨다. 다시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내려놓은 상태로 노래를 불러보기로 결심했다. 피지컬이 옛날과 다르다는 것은 곧 다른 스타일로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이번 < 여행 >이 편안한 보컬과 가사에 집중한 앨범이 된 이유다.
'김나박이'도 일종의 웨이트였을까.
감투라면 감투고 영예라면 영예겠지만 결국 그것 또한 웨이트였던 것 같다. 물론 너무 감사한 표현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저 음악이 좋아서 시작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선수가 되어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노래를 잘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사람들이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압박감도 있었고.
그래서 더욱 < 여행 >에 주도적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작사가와는 어떻게 교감했는지.
가사를 직접 쓰지 않고도 내 메시지를 담기 위해서는 싱어송라이터의 DNA가 필요했다. 주로 그분들과 작업을 했고, 그들이 바라본 나의 25년 삶을 담백하고 투박하게 담고 싶었다. 작업을 하기 전 먼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짧은 대화 속에서 디테일을 캐치해서 잘 해석해주신 것 같다.
그중 최유리가 먼저 눈에 띈다.
놀라운 친구다. 나와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넘는데도, 대화하다 보면 여행하다 우연히 만난 친구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너무 성숙해서 이미 내 여행 과정을 이미 다 겪어본 듯한 '프로 백패커' 같다. 대화가 잘 통해서 친구처럼 한참 이야기를 나눴고 그러다 보니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처음 만든 곡은 '나이'다. 이 곡이 세상에 나오고 난 뒤 곧바로 욕심이 생겨 한 곡만 더 작업해 보자고 했고 그렇게 탄생한 곡이 '여행'이다. 두 곡 모두 좋았지만 '여행'에 곱씹을 만한 요소가 많다고 생각해 이 곡을 중심으로 앨범을 작업하게 됐다.
'그대의 세계'도 감동적인 곡이다. 해당 곡의 작사가 김지향은 어떤 분인지.
박효신의 '야생화'에 참여했던 분이다. 좋은 가사를 찾던 중 이분의 작사가 무척 마음에 들어 작업을 요청했다. '그대의 세계'의 노랫말을 처음 받았을 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날 집에서 바로 가이드를 잡아 보내드렸더니, 이내 본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사를 해석해 불러주신 것 같다고 답장이 왔다. 그런 말을 들으니 괜히 나도 눈시울이 붉어지더라.
보컬 표현에서 어려움을 겪은 트랙이 있었나.
'머그잔'이 그랬다. 담백한 곡이라 쉽게 부를 수 있을 줄 알았다. 심지어 들어갈 때 당당하게 원테이크로 가자고 말하기도 했다. (웃음) 근데 아무리 불러도 마음에 들지 않더라. 조금만 테크니컬하게 접근해도 소리 표현이 안 되고, 반대로 너무 감성에 빠지자니 맛이 살지 않았다. 키나 템포도 조절해 봤지만, 이건 기술적인 부분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미루고 다른 곡을 먼저 작업했다.
나중에 녹음실에 엔지니어 한 명만 남겨두고 불을 다 꺼둔 뒤 처음 곡을 받았을 때 키와 템포로 딱 세 번 녹음했다. 그제야 곡이 나왔다. 귀에 쉽게 들어온다는 이유로 과소평가했던 셈이다. 테크닉과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가사의 표현과 전달 방식에 관해 깊게 고민하지 않으면 절대 소화할 수 없는 곡이었다.
인생의 변곡점이 된 순간을 뽑는다면.
나는 내가 상대적으로 평탄한 여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보고싶다'의 히트 때만 해도 피부로 느껴지는 것은 적었고 그저 곡을 사랑해 주시니 감사했을 뿐이다. 내가 연예인이라는 생각도 딱히 없었다. 에너지 자체를 바꾼 것은 < 나는 가수다 > 출연이다. 쉽게 말하면 MBTI가 바뀐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의 모습을 스스로 차분하게 지켜내지 못했던 것 같다.
코로나19 때 보컬 슬럼프가 맞물려 변곡점이 생겼다.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시대적 이슈로 대중음악 시장도 변했고 나 역시 바뀌었다. 등에 짊어지고 있었던 많은 것들, 그리고 들떠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점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너무 편안하고 모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가진 건 없고 열정만 가득했던 10대 후반 김범수의 감정을 지금 다시 느끼고 있다.
마지막 공식 질문이다. 인생의 음반 다섯 장을 골라달라.
스티븐 비숍의 < Romance In Rio >. 에릭 클랩튼과 얼 클루가 함께 작업한 작품이다. 함박눈 내리는 날 차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김이 서려 창문을 내렸더니 그 틈으로 이 앨범의 수록곡 'On and on'이 흘러나왔다. 바로 갓길에 차를 대고 레코드숍에 들어가 주인에게 어떤 음반인지 물어봤다. 2008년 발매작이지만 지금도 자주 듣는다.
스티비 원더의 < Song In The Key Of Life >. 수학의 정석과도 같은 작품이지만 아직도 즐겨 듣는다. 버릴 곡이 없다. 특히 'Isn't she lovely'를 가장 좋아한다. 내 음악 인생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앨범이다.
안드레아 보첼리의 < Amore >. 듣기 편안하고 질리지 않는다. 바리톤-테너 음역의 소리를 가장 안정적으로 잘 내는 가수라고 생각한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 Buena Vista Soical Club >. 이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보컬리스트라고 생각한다. 순수함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들을 수 있다.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보컬이 아닐까. 영화도 너무 좋다.
마지막으로 베란다 프로젝트의 < Day Off >. 아무래도 내가 라틴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마침 이번 앨범에도 이상순 선배가 '너는 궁금하지 않을 것 같지만'이라는 곡으로 참여했다. 처음에는 보사노바풍을 원했지만, 더 편한 이지리스닝으로 방향을 수정하면서 나온 곡이다.
진행: 임진모, 김태훈, 김호현, 염동교, 장준환, 한성현
리드: 장준환
정리: 김태훈
사진: 한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