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가수, ‘보고 싶다’, 나가수, 김나박이, 급성후두염으로 취소한 20주년 공연 등 여럿 굵직한 모멘트가 박힌 25년 가수의 10년만의 정규앨범이자 통산 9집 앨범. 이를 앞두고 김범수는 예측가능하게도 단촐, 편안, 담백함, 투박 즉 비(非)기법으로 임했다. 부담을 떨쳐내야 가능한 이런 자연성은 심적 ‘내려놓음’을 필요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근데 솔직히 이게 가능한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이 될 필요는 이해하지만 정체성이 다수에게 공유된 대중가수는 자신을 묶고 있는 밧줄을 쉬 끊기는 어렵다.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자아를 부분 수정해야 한다. 새 앨범의 수록곡 가운데 기존 스타일을 따르고 있는 ‘그대의 세계’가 증명한다. 버린다지만 버릴 수 없는 게 ‘그만의 것’, ‘김범수다움’이다. 그래도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혹은 심화하는 예술적 자세는 실천해야 한다. 이 기로에서 김범수는 숙련공과 시작자 둘 모두를 ‘정도껏’ 취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경험 많은 자의 작더라도 경이적인 해석 스킬 그리고 초행길을 가는 신인의 순수와 창의적 두려움을 다 품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숙련공의 관조와 깊이를 반영해 차분한 수동성을 유지하되 속으로는 시작자의 갖가지 운동성을 펼쳐냈다. 다채롭게 하려면 창의적 긴장과 자기분열이 기본이다. 이로 인해 앨범의 음악은 고요와 정지 속에 들어간 것 같은데도 멈추지 않고 발설하고 있다. 내적 자기 쪼개기를 통한 음악에서 들리는 웅성거림이 조금은 요란하다. ‘너를 두고’에서 그의 보컬은 정직하고, ‘여행’에선 온습이 뒤엉켜있고 ‘각인’은 잔뜩 인내한 콧노래이며, ‘나이’는 수련생의 어리숙함이 비친다.
‘머그잔’은 착하고, ‘꿈일까’는 재주를 피며 ‘혼잣말’에선 허세를 부린다. 비슷하게 들려도 실은 하나하나가 차별화, 특화되어 있다. ‘걸어갈게’에서 울먹이는 듯한 ‘두 손은 놓지 않을께’ 대목은 실로 절창이다. 대(大)가수다. 가사야말로 이 비가시적이나 청각으로는 선명히 잡히는 음악적 성과에 일조했다. 뼛속 깊이 가수인 본인 대신 곡을 제공하는 최유리, 김지향, 선우정아, 한밤 등 참여한 송라이터가 마치 김범수의 자작인 것처럼 그에게 빙의되어 들어갔다. 정서와 메시지 측면에서 그들은 김범수와 완벽에 가깝게 동화했다.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노래를 잘하고 싶은 의지와 욕구를 잘 표현해내 인간적이고 그래서 예술적인 음악이다. 사랑, 여행, 상처와 좌절, 자활에의 의지 등 그 모든 생물적 꿈틀거림, 그 희로애락이 보이고 들린다. 계절로 따지면 여기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이 다 있다. ‘사계’ 앨범이다. 폭염만이 없다. 본인말대로 과거의 ‘폭포처럼 쏟아내기’를 피하는 게 첫 번째 과제였을 것이다. 성취는 보컬을 더 알게 된 것. 소리가 다르다.
-수록곡-
1. 너를 두고(나태주/유은재 김범수)
2. 그대의 세계(김지향/Phenomenotes)
3. 여행(최유리/최유리) [추천]
4. 걸어갈게(한밤/한밤 TM) [추천]
5. 각인(선우정아/선우정아 조성태) [추천]
6. 나이(최유리/최유리) [추천]
7. 머그잔(김지향/송영주)
8. 꿈일까(양재선/임헌일)
9. 너는 궁금하지 않을 것 같지만(박창학/이상순)
10. 혼잣말(김제형/김제형) [추천]
11. Journey (Eng ver.)